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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Dec 26. 2023

추리소설 속 저택은 실패가 없다

<샤론 저택의 비밀> ★★★     


추리소설 매거진을 만들어 두고 꽤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 쓰기 싫었거나 읽은 이 없어서는 아니다. 혹여 지나치게 일본 문화에 빠져있다는 오해를 살까봐 주저했기 때문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내 브런치에는 이미 일본의 문화 컨텐츠를 주제로 한 글이 많이 있다. 그런데 추리소설 매거진까지 일본 작품으로 채우면 취향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평을 듣지 않겠는가.

     

영미권이나 다른 나라의 작품을 읽으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고전 추리물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아직도 이 장르가 서양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추리소설, 특히 범인 맞추기 위주의 작품은 사장된 지 오래다.

      

여전히 추리소설이 잘 나가는, 그래서 수준 높은 신작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작품도 일본 소설이 대부분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옛날에 다 뗀 영미 고전이 아닌 따끈따끈한 최신 추리물을 접하려면 선택지는 일본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읽은 책에 대해 재깍재깍 리뷰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반갑게도 미국 작품 중 괜찮은 고전 추리물을 발견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글쓰기 창을 열게 되었다.

     

책 제목은 <샤론 저택의 비밀>이다. 벌써 재미가 동한다.


     



추리소설에서 저택은 필승의 존재다. 특히 우리나라엔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거의 없어, 더욱 신비롭고 미스터리 보인다.


이런 대저택은 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최소 대여섯 개부터 수십 개의 방이 있어 내부구조가 미로처럼 복잡하다. 그래서 방 사용자의 이름을 표시한 도면이 으레 본문에 삽입되어 있는데, 난 이 평면도만 봐도 가슴 가득 기대감이 차오르며 심장박동이 빨라지곤 한다.

     

거대한 저택에는 주인 부부와 자녀들, 초대받은 손님들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용의자 후보에 오른다. 주로 20세기 초중반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는 이런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또 있으니 바로 요리사와 집사, 운전사 같은 고용인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두뇌 회전이 빠르고 입이 무겁고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쥐고 있거나 중요한 목격자의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아, 탐정의 추리를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샤론 저택의 비밀>의 최대 매력은 이런 저택물의 요소를 빠짐없이 갖춘 데서 생겨나는 전형성과 예스러움이다. 사람들이 가장 흔히 떠올리는 종류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비슷한 스타일의 소설이, 그중에서도 수작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다른 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 소설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먼저 탐정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샤론 저택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탐정은 스파이크 트레이시라는 청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탐정들을 생각해 보자. 셜록 홈즈, 에르큘 포아로, 미스 마플, 반 다인 등 대부분 중년 이상이다. 젊은 엘러리 퀸이 있긴 하지만 트레이시와 엘러리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엘러리 퀸은 초기 작품에서는 인간의 심리는 제쳐둔 채 오직 수학적 논리에만 근거해서 추리를 진행하고,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해도 전혀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을 들었다.

      

반면 트레이시는 논리보다는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증거를 토대로 추리하며, 시종일관 감정의 파고에 시달린다. <샤론 저택의 비밀>에서는 여주인공의 매력에 홀딱 빠지는 바람에 추리를 망쳐버릴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난 읽는 내내 제발 이 소설에 연애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게 해달라고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에게 빌어야 했다.




고전파 추리소설을 다룰 땐 뭐니뭐니해도 트릭과 풀이, 반전에 대한 논평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도 가차 없이 평가해 보자.

    

<샤론 저택의 비밀>은 범인을 맞추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범인이 사용한 트릭은 독창적이거나 정교하진 않지만, 단서를 매우 주의 깊게 찾아야 풀 수 있다.

     

반면 어이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단서가 그냥 주어지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탐정의 눈앞에서 사건의 열쇠가 되는 단서를 대놓고 흘려버리질 않나, 경찰이 중요한 증거물을 별 어려움도 없이 얻질 않나. 이런 면에서 짜임새가 아주 뛰어나진 못하다.

     

대다수 사람들이 추리소설에 기대하는 재미 요소인 반전은 어떨까? 내 기준에서는 합격이다. 읽는 내내 한 번도 그런 반전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당히 놀랐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반전의 내용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고 본다. 나는 추리소설에서 이런 종류의 비밀이 드러나는 건 처음 봤다. 말이 안 되는 구석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말이 아예 안 되지도 않는다. 나한텐 ‘호’다.

     



<샤론 저택의 비밀>은 키멜리움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라는 기획에 속한 작품이다. 현재는 이 작품을 포함해 단 두 권만 출간되었다.

     

우연히 인터넷 서점 쇼핑을 하다 이 시리즈를 발견하고는 당장 흥미를 느껴 단단히 점찍어 놓았다. 다른 한 권은 작년에 먼저 읽었는데 꽤 괜찮았고, 이번 작품도 아주 재미있게 본 터라 어서 차기작이 나왔으면 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두 권의 책은 표지 그림표제 디자인이 예쁘고 본문 글꼴도 독특해 나 같은 덕후의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다음 편 빨리 내달라고 출판사에 이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나. 말 나온 김에 진짜 문의해 봐야겠다. 궁금하다,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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