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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an 15. 2024

추리소설도 멋진 문학 작품이기를 원한다

<방주> ★★☆


서점에서 유키 하루오의 <방주>를 집어든 순간, 띠지에 커다랗게 인쇄된 광고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극한의 뇌 정지, 미친 반전! 

    

.... 정말일까?




<방주>는 분명 장점이 많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을 충분히 살리기에는 작가의 글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

    

초반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부여된 딜레마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해하며 잔뜩 기대감을 안은 채 읽어나갔다.

     

그러나 직업 소설가가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면적인 문장은 몰입을 방해했다. 작가는 좀 더 간접적으로, 비유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장면에조차 불필요한 설명을 넣곤 했다.

     

결국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모임은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났다. 
아홉 명이 한자리에 모이자 다들 어쩐지 위기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다들 어쩐지 위기감을 느꼈다니, 인물들의 심리를 생생히 표현하기에는 너무 평범한 문장이다. 대신 잔뜩 경직된 표정이나 초조한 몸짓, 눈빛, 목소리의 떨림 등으로 위기감을 나타냈다면 훨씬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옆 페이지의 다음 문장도 그렇다.

    

오후 3시쯤이었다.
어제처럼 자유로이 행동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묘사도, 비유도 없이 아주 직설적으로 3시라는 정확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그 시간의 성격까지도 마치 보고서를 쓰듯 있는 그대로 서술해 놓았다. 인물들이 처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비해 전반적인 분위기가 지나치게 밋밋하고 스릴이 부족한 것은 이런 무미건조한 서술 때문이다.

     

추리 소설의 핵심인 복선과 암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도 서툴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구체적으로 밝힐 없지만, 몇몇 소재는 소설 속에 너무 자주 등장하고 반복해서 강조된다. 독자는 자연히 앞으로의 전개에서 그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어도 그것들의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추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도 못한다. 그것은 으스스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거기에 무언가 중대한 비밀이 얽혀있으리라 추측한 독자는 가셔지지 않는 찝찝함만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반전은 어떨까. 과연 온몸이 떨릴 정도로 충격적일까? 내 의견은,


꽤 놀랍긴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다.’

     

반전은 반전이 있는지도 모를 때 가장 충격적인 법이다. 반전을 극도로 강조한 광고 문구를 본 상태에서 결말을 접하니 충격파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의 반전은 본격(고전) 계열 추리물 치고 불공평하다. 대개 고전 추리물은 독자와의 페어플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전 요소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본문 속에 남겨놓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그런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반전을 접한 독자가 ‘뭐야, 그런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혹은 ‘갑자기 그런 게 어딨어?’ 라는 반응을 보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방주>를 지루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폐쇄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어떻게 묘사해도 재미없기가 힘든 데다, 서두에 썼듯 방주라는 장소의 구조적 특이성이 장르의 묘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탐정의 추리 역시 칭찬해 줄 만하다. 철저히 논리에 입각한 범인 지목 과정은 유려하지 못한 작가의 필력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 가장 중요한 추리마저 죽을 쒔다면 소설에 대한 평가는 형편없이 낮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은 ‘방주’와 ‘추리’라는 두 가지 장점에 모든 능력을 쏟아부은 대신 문학성은 크게 욕심내지 않은 소설이다.

     

근래에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나오는 일본 추리소설들은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이런 맹점을 안고 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트릭,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만 힘을 쏟은 나머지 기교는 훌륭하지만 문학성과 깊이가 떨어진다. 나는 그런 기계적 성질이 반갑지 않다.

     

같은 본격 추리소설이라도 고전은 다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으며, 엘러리 퀸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박진감은 대단하다. 반 다인은 무궁무진한 지식을 자랑하며 딕슨 카는 역사적 사실을 허구와 버무리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묵직하고 심도있는 작품은 일본에도 있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2차 대전 후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시대상을 추리 작품에 절묘하게 녹여낸 작가이며, 읽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필력의 소유자였다.

     

본격 추리물의 애호가로서 장르의 명맥을 이어가는 일본 추리소설가들에게 일차적으로 고마움을 느끼나, 그들이 문학성에 있어서도 선배들을 뛰어넘으려 시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 역시 그들의 성공과 추리소설의 번영을 위해 꾸준한 구매자이자 충실한 독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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