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Jan 07. 2024

권모술수를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거에요

클래식 클라우드 열한 번째 책,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편은 이제껏 읽은 열한 권을 통틀어 시리즈 중 가장 어려웠던 책 1, 2위를 다툰다. 경쟁 상대는 물론 니체 편이다. 언뜻 짜라투스트라의 사자나 낙타 이야기보다는 마키아벨리의 계략 편이 훨씬 쉬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중세 이탈리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또 마키아벨리는 앞서 접했던 거장들과 다르게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한 공직자였으므로, 피렌체의 정치 상황을 떼어놓고는 그의 생애를 논할 수 없다. 그런데 난 이탈리아나 피렌체의 역사에 무지했으니 어떠한 내용이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책을 다 읽고도 큰 흐름이 머릿속에 남지 않는 사태에 이르렀고, 나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별도의 공부를 해야만 했다. 오랜 기간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의 주요 인물을 정리하고, 그 기간 동안 있었던 외세의 침략을 체크하며, 마키아벨리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나열했다. 그렇게 연표를 만들어 공부하고 나서야 흐름이 잡혔다.

     

그러나 이 글까지 연표로 만들어 시간 순으로 일어난 사건을 늘어놓는다면 역대급 노잼 글이 될 것이 뻔하니, 다른 방식으로 가보자. 먼저 마키아벨리라는 사상가를 형성하는 중요한 특징부터 정리해 보겠다.

     


르네상스와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자라며 인문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케이스였다. 르네상스의 근본 정신인 인문주의는 인간, 언어, 역사를 강조하는데, 마키아벨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사상가였다.

     

마키아벨리 이전 중세의 정치 사상가들은 정치를 종교의 틀에서 관념적으로 다루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역사의 틀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토대로 정치를 현실적으로 설명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읽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이었다. 오늘날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가 정치학자나 철학자로서보다 역사가로 불리우는 것도 그가 <피렌체 사>나 <로마사 논고>와 같은 역사책을 저술한 까닭이다.

     

역사학에서 르네상스가 근대 정신을 일깨우는 신호탄으로 평가되듯 마키아벨리도 근대 정치학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지배적인 정치관은 선정, 즉 선한 지배자가 덕을 베풀며 정치할 때 좋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런 기존의 정치관에 반기를 들고 도덕이 현실에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의 근대성은 바로 이렇게 도덕주의 정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200p)



피렌체의 정치 변동과 마키아벨리의 일생

     

주요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문제 의식은 조국 피렌체가 약소국에 불과해 수시로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피렌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마키아벨리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알아보자.

     

마키아벨리는 1469년 태어나 1527년 죽었다. 연표 얘기가 아니니 안심하고 그가 대강 그 정도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생각보다 꽤 옛날 사람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인물이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가 배출한 정치가 중에서도 가장 능력이 뛰어나서, 그의 통치 시기 피렌체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인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를 후원한 이가 바로 로렌초다.) 그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피렌체는 껍데기는 공화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열 살이 된 해, 교황이 나폴리와 연합하여 피렌체에 쳐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이야 나폴리나 피렌체가 다 같은 이탈리아지만 그땐 별개의 도시국가였다. 교황도 지금은 종교의 수장일 뿐이나 그땐 세속적 왕이나 다름없었고, 교황령도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1500년 경 지도. 이 시기에 이탈리아는 11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색깔 동그라미로 표시해보았다.

     

로렌초는 이 사태를 평화조약을 맺어 해결했지만, 피렌체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가 25살 때 프랑스의 왕 샤를 8세가 침략해 온 것이다. 이때 피렌체는 예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지역인 피사(피사의 사탑이 있는 그 피사 맞다)를 프랑스에 빼앗기고, 침략에 무력했던 메디치 가의 통치는 무너진다.

     

그 대신 정권을 잡은 자는 교황과 척을 져 몰락하고, 또 다른 이가 정부의 최고위직 자리에 올랐다. 이때 스물아홉이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공직에 발탁되어 제2서기관과 10인 위원회라는 기관의 위원으로 일하게 된다. 각각 외교와 국방을 맡은 자리였다.

     

마키아벨리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어서 중요한 정치 현안을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 결정에 도움이 되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보고서는 간결하고 핵심을 담고 있어 정부 인사들이 돌려가며 읽었다고 한다. 천생 공직자였던 그의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시기의 공직 생활 경험은 훗날 그가 <군주론>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외교와 국방을 맡은 마키아벨리는 강한 군대를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샤를 8세에게 빼앗긴 피사를 수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는 주변국과의 전쟁 시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닌 돈으로 고용하는 용병을 내보내고 있었다. 인민에게 무기를 주고 군인으로 육성하는 일을 귀족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용병이 피렌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줄 리는 만무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국민으로 군대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피렌체 시민은 생계를 핑계로 군대에 가려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하는 수 없이 시내가 아닌 근교의 농촌에서 농민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었고, 이 군대로 피사를 점령한다. 자신이 만든 군대로 피사를 점령한 뒤 피렌체로 개선 행진을 했을 때아마 이때가 마키아벨리의 삶에서 최고의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82p)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후, 교황이 외세와 연합해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자 메디치 가가 교황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장악해 버린 것이다. 다시 권좌에 오른 메디치 가는 본인들이 없던 시절의 정부, 즉 공화정에 복무한 마키아벨리를 공직에서 쫓아내고 감옥에 가두었다.

     

옥고를 치르던 마키아벨리는 다행히 메디치 가의 인물이 교황에 오르면서 내린 대사면령에 의해 풀려나 지방의 농장에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이라는 주요 저작을 집필한다.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 관료들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후, 귀양간 곳에서 집필 활동에 매진한 것과 비슷하다)

     

마키아벨리는 피땀 흘려 완성한 <군주론>을 메디치 가의 최고 지도자(사실상 군주)에게 바쳤지만 그는 마키아벨리의 책에 별 관심이 없었고, 11년 후 피렌체는 또다시 강대국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신세에 놓인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에 가까워져 있었다.

     

침략을 받은 메디치 가는 재차 실각하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들어선다. 마키아벨리는 새 공화정 하에서 다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으리라 희망하며 제2서기관에 지원하지만 탈락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피렌체의 정치 상황과 얽힌 마키아벨리의 일생이다. 그가 공직에 있었던 기간은 단 14년이며 메디치 가(군주정)의 통치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됐을 때와 일치한다. 피렌체는 몇 번이나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마키아벨리의 정치론은 위정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런 배경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그의 사상을 접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두 종류의 권력

     

마키아벨리의 저서는 이 두 권 말고 더 있지만, 이 글에서는 두 저작만을 다루기로 한다. <군주론>은 오늘날 가장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저서이며 <로마사 논고>는 학자에 따라 군주론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도 받는 작품이다.

    

<로마사 논고>는 공화정을, <군주론>은 군주정을 주장하는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어,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가 두 저서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한 이유는 책을 읽을 독자가 달랐고 상정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사 논고>는 공화정의 이상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읽도록 쓴 책이었던 반면 <군주론>은 메디치 가의 (사실상) 군주인 로렌초 2세에게 바친 것이었기에 다른 주장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상반되어 보이는 주장이 결국 한 뜻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 편의 저자인 김경희 교수님이 <군주론>을 읽을 때 ‘권력’ 에 초점을 맞춰 읽기를 권하시니, 한 번 그대로 해보자.

     

권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개인의 권력이며, 다른 하나는 관계의 권력이다. 전자가 군주의 힘이라면 후자는 군주‘국’의 힘이며, 전자가 한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이라면 후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공동체의 역량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에는 이 두 가지 권력이 모두 필요하나, 상황에 따라 적절한 힘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건국 시에는 개인 – 군주의 권력을, 치국 시에는 관계 – 군주국의 권력으로 정치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건국과 치국의 차이가 드러난 역사적 경험은 동양에도 여럿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을 예로 들면, 3대 왕 태종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폭력을 서슴치 않고 휘둘렀다. 덕분에 안정된 왕권을 물려받은 4대 왕 세종 치세에는 감옥이 비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옥사가 거의 없었으며, 군주의 탁월한 역량에 신하들의 유능함이 더해져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을 일컬어 능력있는 왕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왕이라고 칭하기엔 애매하다. 마키아벨리가 태종을 알았다면 나라를 새로 세우고 안팎의 위기에 대처하며 제도를 정비하는 건국의 군주는 그처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칭찬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져 찾아보니 태종은 마키아벨리보다 100년이나 일찍 태어났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폭력과 속임수의 필요성은 철저히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무조건 권모술수가 좋다거나, 누구나 폭군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군주는 필요에 따라서는 비도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무분별하게 권력을 휘두르거나 음모를 일삼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대표 저작 두 권의 내용이 상반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생각에 피렌체의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는 개인 – 군주 - 건국의 권력이 필요했고, 또 당시 피렌체의 정치 체제가 사실상 메디치 가의 군주정이나 다름없었기에 현실에 맞춘 처방인 <군주론>을 쓴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진정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관계 – 군주국 – 치국의 권력이었다. 그래서 <군주론>을 저술하고 바쳤음에도 그를 공화주의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용병을 비판하며 인민의 힘을 모아 자국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긴 것이 그 증거다.

     

그는 건국의 혼란이 잦아들고 제도가 어느 정도 정비된 후에는 나라에 안정을 유지하며 평화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력과 권모술수보다 대화와 설득의 방식을 중요시했다.

      

마키아벨리가 저서를 통해 제시한 개념 중에는 이 두 종류의 권력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포르투나’ 와 ‘비르투’ 에 대해 살펴보자.

     

포르투나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운명, 혹은 타인의 힘이다. 비르투는 내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역량, 즉 자신의 힘이며 포르투나에 대항하는 힘이다. 마키아벨리는 운명(포르투나)은 내가 바꿀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역량(비르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를 두 가지 권력에 대응하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는데 하나는 개인 – 군주 – 건국의 권력이며, 다른 하나는 관계 – 군주국 – 치국의 권력이다. 이는 또한 각각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주장과 연결된다. 즉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운명(포르투나)에 대항하는 인간의 역량(비르투)는 지도자 개인의 탁월한 능력일 때도 있지만 인민의 집단적 힘이기도 한 것이다. (278p)

    

마지막으로 ‘공공선’ 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비도덕적인 행위도 불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공공선을 위할 때가 바로 그때이다.

     

공공선에 쓰이는 한자 공은 公과 共 두 가지이다. 영어로 公은 public, 共은 common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公의 반대는 당연히 사私로, 군주는 당연히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데 공公이 지나치면 타락할 위험이 있으니, 공을 위해 사가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언제나 전체를 개별보다 앞세우는 전체주의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共이 지나쳐도 타락할 수 있다. 개별 부분의 합의가 없다면 전체나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이는 전체의 관점을 간과하고 파당화되는 위험으로 이어지며, 국가는 몰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전체와 부분, 공公과 공共의 조화를 이룰 때 공공선이 탄생하고,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 × 김경희> 편을 읽고 공부한 바로는 우리 대중들이 마키아벨리에 대해 오해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이제 마키아벨리를 악인이나 계략가라기보다 투철한 공직자에 현실적인 정치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의 공화정을 향한 애정과 동경에는 현대인들이 본받을 점이 있다. 자나깨나 부국강병을 위해 고민하고 공무에 몸바친 점은 공직자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 하고, 공공선을 도모하며 특정 계층이 아닌 모두가 자유를 갖기를 바란 것은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모두 배워야 할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군주론>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김경희 교수님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책에서 배운 모든 것을 브런치 지면에 다 옮기진 못했으나, 열과 성을 다해 정리한 내용인 만큼 독자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군주론>은 흔히 말하듯 성공을 위한 지침서도,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전략서도 아니다. 모든 나라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을 탁월한 고전 지식과 탄탄한 정무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 책이다. - 178p     
이전 11화 그에게 현실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