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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Dec 31. 2023

그에게 현실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까

클래식 클라우드 열 번째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은 건 7~8년 전이다. 참여하던 독서모임의 주제 도서였었다. 부끄럽게도 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것도, <설국>이 그 영광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그제서야 알았다.

    

소설은 명성만큼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유명한 이 첫 문장만큼은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으나 그게 다였다. 난 <설국>이라는 작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매우 모호하면서 동시에 감각적이라는 느낌 외에 어떠한 감동을 받지 못했다.

     

이제야 알았지만 <설국>은 내가 읽었던 식으로, 늘 소설을 읽던 방식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이해하려 해도 안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번 <가와바타 야스나리 × 허연> 편의 내용 전체가 그 대답이다.


<설국>을 읽는 요령

     

허연은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이후 시인으로 등단한 문학인이다. 그분의 설명을 따라 <설국>을 읽어보자.

    

<설국>은 다른 소설을 읽을 때처럼 인과관계와 줄거리의 진행, 즉 기승전결에 유의해서 읽어선 안 된다. 대신 마치 시를 감상하듯 이미지를 느끼며 읽어야 한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 다소 콧날이 오똑한 둥근 얼굴은 그저 평범한 윤곽이지만 마치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에다, 목덜미도 아직 가냘퍼, 미인이라기보다는 우선 깨끗했다.

     

<설국> 속 여주인공 고마코의 외모를 묘사한 문단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독자는 자연스레 고마코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시마무라는 작년 세밑의 그 아침, 눈이 비치던 겨울을 떠올리며 경대 쪽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

고마코의 살결은 금방 헹궈낸 듯 깨끗해서 시마무라가 어쩌다 내뱉은 말 한 마디조차 그런 식으로 오해할 여자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데에, 오히려 거역하기 힘든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고마코의 깨끗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난 그 여인의 깨끗함이란 대체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 상상해 보았다.

      

<설국>의 ‘설’ 에 생각이 가 닿으면서 눈의 새하얀 깨끗함이 떠올랐다. 고마코는 분명 눈의 청결함을 닮은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서늘하고 순수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책에는 고마코의 모델이 된 게이샤 마쓰에의 사진도 실려 있다. 그녀도 깨끗하다는 묘사가 어울리는 미인이다. 그러나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소설을 통해, 고마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정결함은 분명 그 사진을 넘어선 곳에 있는 궁극의 깨끗함, 즉 깨끗함의 ‘이데아’ 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현실에 없는 절대미를 추구한 예술가였다.

     

<설국>에서 두드러지는 상징으로는 거울이 있다. 소설에는 유독 여주인공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거울에 비친 여인들의 상이 주인공 시마무라가 바라본 그들의 이미지이며, 독자는 그 이미지를 통해 인물의 특징을 이해한다. 앞에서 인용한 문단에도 경대가 등장했고 다음 문단도 마찬가지다.

     

시마무라는 그쪽을 보고 움찔 목을 움츠렸다.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는 은하수다. 은하수를 묘사한 다음 장면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허무 의식이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된 몸이 공중에 떠올라 유연해지고 동시에 인형 같은 무저항생명이 사라진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생명의 사라짐, 즉 죽음을 자유로움으로 표현했다. 은하수가 상징하는 비현실에서는 삶과 죽음의 구분이 의미를 잃는다. 나중에 더 자세히 쓰겠지만, 이런 허무주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전 생애와 전 작품을 지배했다.

  

<설국>의 다른 특징으로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이라고도 하는 양면 지향성을 들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설 속에 상호 대립되는 이미지를 집요하리만치 지속적으로 등장시켜 묘사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어느새 해가 뜨는지 거울 속의 눈은 차갑게 타오르는 듯한 광채를 더해 갔다. 그럴수록 눈 속에 떠오른 여자의 머리카락도 선명한 자줏빛이 감도는 검정색으로 한층 짙어졌다.

     

구름이 끼어 응달진 산과 아직 햇살을 받고 있는 산이 서로 중첩되어 음지와 양지가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은 왠지 싸늘해지는 풍경이었다.


현실과의 거리두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절대미를 추구했다고 했는데, 이는 작품 속에 <설국>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과도 관련된다. 설국, 즉 눈의 고장의 실제 모델은 니가타 현의 에치고유자와라는 곳이지만 소설 속에는 그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설국>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라고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추구한 절대미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 구체적인 현실 묘사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현실과 ‘거리두기’ 했다는 사실은 어느 작품에서도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가 없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때였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국의 군국주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예술 지상주의자였다. 절대미를 찾아 헤매는 그에게 전쟁이나 이념, 국가주의는 어울리기 힘든 세계였을 것이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소년이 되기도 전 부모와 조부모를 비롯한 모든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목격한 그에게 현실은 그 자체가 무의미했다. 삶과 죽음의 궁극을 본 그에게 현실이란 어느 순간 가차 없이 사라지는 것에 불과했을 테니. - 213p

     

이것은 <설국> 속 은하수의 이미지를 소개할 때 언급한 짙은 허무 의식과도 연결된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현실 인식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4년 후인 1972년,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 자살했다. 본인 소유의 리조트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가스를 들이켰다. 유서도, 전조도 없었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 가능하지만 여기에는 허연 작가의 해석을 인용해 보겠다.

     

나는 그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죽음의 형식을 갑작스레 실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종종 ‘죽음을 미화하고 싶었다’고 틀어놓았다. 그의 정신 구조에서 죽음은 병마에 시달리다 끌려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 265p


그는 도무지 생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아름다움에 탐닉하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지만, 생에 대한 긍정적 의지에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하루하루 앞에 있는 일을 해낸 것일 뿐이었다. (…) 아마도 그는 눈앞에 당장 뭔가 해야 할 일이 눈에 띄지 않는 순간 죽으리라는 결심을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 275p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리에 대한 이런 해석이 옳다면, 나는 그가 느낀 허무함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처럼 죽음을 미화하고 싶진 않지만 근본적으로 삶이나 생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정도의 깊은 허무감에 이르렀다면 나는 허무라는 바다의 아주아주 얕은 곳에 발만 담그고 있는 느낌이랄까.

     

태어난다는 것, 산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일까? 추악의 양면이 공존하는 현실은 가치있는 것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거의 모든 방면의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예술 지상주의자였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자주 현실을 비현실처럼, 비현실을 현실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은 내 머릿속, 가슴속에 존재하는 환상을 위한 물리적인 뒷받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이 판타지를 지켜주지 못하고 침범할 때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매일의 현실에 충실할 뿐이다. 업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일을 대충하는 행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고, 각종 취미에 천착하는 것은 교양과 지식의 발전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삶을 그 자체로 찬양할 수 있는 긍정이 내겐 없고,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나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이런 허무 의식을 공유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읽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점, 시대를 풍미한 거장조차도 무가치와 무의미의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심리적 동지가 되어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설국>을 읽고 싶다.


 노벨상의 반은 번역가에게


<설국>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미국인이었다. 그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설국>은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상의 절반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상금의 반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사이덴스티커는 일본어만 잘했던 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습속을 뼛속까지 이해한 사람’이었다고 설명된다. 그는 번역의 고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설국>이 번역 불가능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 역시 이 작품을 번역 불가능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의 사용이 너무 미묘하고, 너무도 모호합니다. (…) 번역 불가능한 것도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하는 것은 번역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 123p


허연 작가는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을 예로 들어 사이덴스티커의 영문 번역을 소개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주어가 없어서 느낌이 산다. 한국인은 번역문으로도 이 문장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우리말도 주어 없이 문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는 그렇지 않다. 주어 없는 문장을 어떻게 영어로 옮길 것인가. 사이덴스티커는 의역을 택했다.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기차를 주어로 세웠다. 언어적 차이를 고려할 때 최선의 번역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원래의 느낌을 다 전달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설국>에 한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권 사람들보다 작품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러나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설국>이 가진 일본미의 정수와 정신적 바탕이라는 핵심만은 놓치지 않았던 것 같다. <설국>이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된 이유가 ‘자연과 인간의 운명이 가진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 는 점이었으니,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전달한 것이다. 나는 저 문장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 두 가지 키워드를 다른 말로 바꿔 보았다.

    

유한한 아름다움 → 삶의 허무

회화적 언어 → 이미지     




연재는 언제나 숙제를 남긴다. 30권에 달하는 해설서를 읽는 일은 결국 원전을 감상하기 위한 기초다지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번 편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읽기 전의 준비운동이다. <설국> 다음엔 <이즈의 무희>가 목표다. 물론 책에는 그보다 더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눈을 흔히 볼 수 있는 고장에서 자랐다면 <설국>을 읽으며 다른 감상을 느꼈을까? 우리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추워도 어지간해서는 눈이 내리지 않는 지방, 이 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설국은 가장 명백한 비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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