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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an 19. 2024

그녀가 어설피했던 시절의 노래 두 곡

올해 세는 나이로 일곱 살이 된 우리 아이는 가끔 단어를 틀리게 말할 때가 있다. ‘어설피해’ 가 그 예로, ‘어설프다’ 라는 말을 어설프게 습득하는 바람에 나온 말이다.

     

아이는 주로 엄마 아빠가 자기가 내는 만화 퀴즈를 맞히지 못하거나, 티니핑 노래를 엉망진창으로 부를 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너무 어설피하잖아!”

     

엄마 아빠를 가르치느라 신이 난 아이의 외침에서 서투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떤 이 떠올. 내가  이미 브런치에서 여러 번 팬심을 밝힌 가수 보아다. 그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프로페셔널함과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 완벽해 보이는 보아조차도 어설피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1집 활동 때였다. <ID:Peace B>나 <Sara>를 떠올리면 안 된다. 그 곡들은 타이틀과 후속곡이었고, 가장 잘 부른 노래들이었다.

     

수록곡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1집에는 90년대의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는, 한 번만 들어도 멜로디가 귀에 꽂히는 쉽고 좋은 곡들이 많다. 다만 감출 수 없는 미숙함이 드러나는 것은 보컬이다.

     

언젠가 보아는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조차도 1집은 잘 듣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너무 못해서’란다.


중견가수의 입장에서 과거의 작업물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내가 듣기에 어린 보아의 노래는 못한다기보다 ‘배운 그대로 정직하게 부른다’ 에 가까웠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1집을 냈을 때 그녀가 우리 나이로 불과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3년간의 하드 트레이닝을 거친 보아는 이미 발성부터 평범한 중학생의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앳됨과 풋풋함까지는 당연히 지울 수 없어, 어린이까진 아니어도 미성년자가 불렀다는 흔적은 역력하다. 그 점이 어설피한 부분이긴 하지만 동시에 귀엽고 순수하게 들리기도 한다. SM은 그런 소녀에게서 무리하게 어른스러움이나 성숙함을 끌어내려 하지 않고 나이다운 싱그러움과 순진함을 살리는 쪽으로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ID:Peace B의 꺾기 춤만 기억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소개할 노래 두 곡을 듣고 완전히 다른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보아가 이렇게 결이 고운 곡들을 불렀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비밀일기>라는 곡은 소녀가 언니의 남자친구를 짝사랑한다는, 몹시 진부한 스토리다. 보아가 10대 후반만 됐어도 가사가 너무 유치하다는 소릴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해요

그댈 사랑해요

언니 옆에서 행복해 하는

그 모습에 나는 또 울고

꿈에서라도 그대 곁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죠

     

그러나 정말로 사랑을 고백하듯 떨리는 목소리와 꾸밈없는 음색은 자칫 오그라들 수 있는 노랫말조차 어린 시절의 순수한 첫사랑 이야기로 들리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멜로디 덕에 첫사랑은 더욱 애틋한 추억이 된다.

    

비밀일기 - 보아(2000)



같은 작곡가가 만든 <먼 훗날 우리>도 특기할 만하다. <비밀일기>보다는 약간 템포가 빠르지만 귀엽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곡이다. 크레딧엔 ‘은비’라는 분이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쩜 이렇게 예쁘고 듣기 좋은 선율을 잘 뽑아냈는지 놀랍다.

     

<먼 훗날 우리>는 역시 보아 콘서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규모는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아이돌보다 훨씬 작았지만, 팬들의 열정만큼은 내가 가본 어느 공연보다 진실했다.

      

그들은 앵콜 요청할 때 합창하기로 했던 <먼 훗날 우리>를 단 한 명도,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리 높여 불렀다. 대부분 보아와 엇비슷한 나이일 것이 뻔한, 사회생활을 한 지 한참 된, 나처럼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팬들이 하나 되어 목청껏 노래하는 모습은 감격적이었다.

      

먼 훗날 우리 만나게 된다면

참아왔던 눈물 흘리겠지

오랫동안을

바라보지도 못했던 사랑으로

     

늘 처음처럼 만날 수 있다면

바라만 보지는 않을 거야

바보처럼

후회할 테니까

그때는 날 안아줘 놓지 말아줘

     

거듭된 앵콜 요청에 모습을 드러낸 보아는 반주도 없이 팬들과 입을 맞췄다. 데뷔 시절의 노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해 어물거린 것은 팬들 앞에서만 보일 수 있는 어설피한 인간미였다. ‘먼 훗날 만난’ 가수와 팬은 함께 성장한 나날을 돌아보며 행복에 겨워했다. 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날의 오붓했던 정경이 떠올라 감상에 젖는다.


먼 훗날 우리 - 보아(2000)

          


세련됐지만 조금은 어려운 지금의 케이팝과는 달리 누구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곡들이니 부담 없이 감상해 보시길 바란다. 천진한 소망이 담긴 선율에서 따스함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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