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내 책장에 진열해 놓은 엘러리 퀸 전집이다. 채도 높은 색상의 띠지들이 단조로움을 거부하며 일제히 도열해 있다.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재질의 양장본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1930년대 미국의 하드커버를 콘셉트로 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퀸Queen의 머릿글자인 알파벳 Q 안에 들어가 있는 두 작가의 사진도, 제목과 어우러지게 삽입된 포인트 이미지도 세련된 흑백이다.
책의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예쁘지만 결정적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내지였다. 출판사는 초판본 1쇄에 한해 내지를 다음 사진처럼 빈티지한 스타일로 뽑았다. 고서를 연상시키는 저 고풍스러운 내지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남은 것은 보물이 발간되는 족족 사들이는 일뿐이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고전 추리소설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엘러리 퀸을 알게 된 것은 이 전집이 발간되기 한참 전이었다. 중학생 때 소위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로 불리는 <Y의 비극>을 읽은 뒤로, 도서관에서 퀸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빌려 보기 시작했다.
그때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판본은 동서 미스터리 북스라고, 여러 추리 작가들의 대표작을 한데 모아놓은 몇 백 권짜리 시리즈물에 속한 것이었다. 그 책들은 일본어 중역이 비일비재했을 뿐 아니라 본문 내용과는 상관없는 표지 그림, 올드한 글꼴 등 단점이 가득했으나, 나 같은 추리 매니아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록에 드문드문 들어있던 퀸의 대표작들은 모두 엄청난 재미와 충격을 선사했다.
그러다 20대 중반이 되어 검은숲이라는 출판사가 엘러리 퀸만의 전집을 정식으로 출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만들어지다니.
알고 보니 검은숲은 오래된 출판사인 시공사의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였다. 현재도 스릴러·미스터리 소설을 활발히 출간하고 있으며, 유명한 작품으로는 <앨리스 죽이기> 등의 죽이기 시리즈가 있다. 장르문학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번역해 소개해주는 고마운 곳이다.
나는 까마귀 로고가 책등에 앙증맞게 그려진 퀸 전집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한 권씩 담으면서, 내가 직장인이고 월급쟁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곤 했다. 이 아이들을 꼬박꼬박 사 모을 수 있으니까.
그러던 2015년의 어느 연휴, 나는 초록색 계열 띠지를 두른 다섯 권을 한꺼번에 질러 버렸다. 엘러리 퀸의 원숙기를 장식하는 걸작들이었다. 책들을 젠가 블록처럼 책상에 쌓아두고 하나씩 독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권을 다 읽어도 넷이나 남아 있고, 두 권을 읽어도 셋이나 남아 있는 광경을 보니 차오르는 만족감에 절로 배가 불렀다. 행복의 폭식이었다.
하지만 양이 양이다 보니 휴일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스러운 내지에만 코를 박고 있었는데도 다섯 권을 다 읽어내지 못했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집에 둔 채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아까워서 상하체가 일동 차렷 자세로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결국 이튿날 출근한 내 가방 안에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이 숨어 있었다. 책갈피를 재갈처럼 책에 물려두고 나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사무실에서 막내였던 나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윗분들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싶을 때쯤, 얼른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모니터 뒤에 숨어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다. 지금 생각하니 멋없는 자세에 현타가 좀 오지만 그땐 그럴 겨를도 없었다.
퇴근한 후 남은 분량을 마저 다 읽고 나서야 마음에 평화가 깃들었다. 동시에 거대한 아쉬움이 몰려들었다. 이 정도로 흡입력 있는 책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젠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나. 나는 완독의 헛헛함에 괜스레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뺐다가 순서를 바꿨다가 하며 애꿎은 손만 움직였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퀸 전집의 출간 소식이 뜸해지자 출판사 블로그에 들어가 봤다. 그런데 이게 웬 뜻밖의 소식인가. 엘러리 퀸 전집은 현재 새 책을 출간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안 돼!! 가장 근간이 무려 2019년 것이란 말이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퀸의 작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시리즈를 끝내버리면 어떡하나. 그러고도 전집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의 판매량이 저조했기 때문에 출간을 중단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난 열심히 샀는데. 이 훌륭한 시리즈의 진가를 사람들이 몰라주다니. 몹시 애통했다.
이제 브런치에 파놓은 추리소설 매거진에 엘러리 퀸의 걸작들에 대한 감상문을 올리며 아쉬움을 해소하려 한다. 모든 편은 아니더라도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에 대해 드문드문, 긴 기간에 걸쳐 리뷰를 씀으로써 나의 깊은 애정을 표현할 생각이다.
지금 그 아이들은 나 아닌 다른 이의 눈에 띄어, 책장을 벗어나 집의 곳곳에 분산되어 있다. 한창 색감에 민감할 나이인 일곱 살은 알록달록 띠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의 보물창고에서 그것들을 잔뜩 꺼내 가상의 친구 푸딩핑의 집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난 원래 내 소중한 책들을 저렇게 함부로 다루는 것을 누구에게도 용납하지 않으므로, 예외가 생긴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대신 언젠가 일곱 살이 열세 살이 되고 열여섯 살이 되면 그 안에 담긴 끝내주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알아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