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Jul 13. 2024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HOT와 NCT의 <캔디>

일곱 살인 딸아이는 한 달 전부터 태권도장에 다니고 있다. 가기 싫다는 걸 같은 반 친구들 따라 체험수업이라도 받아보라고 보냈더니, 바로 태도가 바뀌어 계속 다니고 싶다고 난리였다. 잘됐다 싶어 냉큼 등록했다.

    

듣던대로 태권도장은 종합육아센터나 마찬가지다. 태권도 뿐 아니라 줄넘기와 트램폴린 등도 가르치는 모양인데, 아이는 그게 무척 재미있는지 집에 와서도 거실 매트 위에서 온갖 운동을 한다. 줄넘기용 줄을 사주었음에도 아직도 테권도용 흰 띠로 줄을 넘고, 20개월 때 사준 유아용 트램폴린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온갖 동작을 넣어 점프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들어보니 아이가 어딘가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특히 끝날 때 크게 한 번 점프를 하며 ‘캔디!’하고 외치는 것이, 꼭 내가 아는 그 캔디처럼 들렸다. 처음엔 태권도장에서 굳이 저 오래된 노래를 틀어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른 동요나 활동곡이겠지, 하며 무심히 넘겼다. 관장님이 보내주신 도장에서 찍은 영상을 본 후에야 그 캔디가 맞다는 걸 알았다.

     

사실은 오늘 너와의 만남을 정리하고 싶어 널 만난 거야, 이런 날 이해해.

     

심지어 2022년에 NCT드림이 리메이크한 버전이 아니라 1996년에 HOT가 발표한 오리지널 곡이었다. 태권도 사범님들도 다 20대라고 하니, 아무래도 관장님 픽인 듯했다.

     

아이가 이 노래를 안다는 사실이 반갑고 신기해서 전곡을 틀어준 게 실수였다. 계속 들려달라는 요청에 한 곡 무한반복을 걸어놓아야 했다. 난 다른 케이팝도 듣고 싶은데, 아이는 캔디만 틀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는 노랫말을 목청껏 따라 불러대는 아이를 보니, 절로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캔디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케이팝 중 하나다. 난 일 년간은 국민학생이었다가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단 1년이라도 국민학교를 다녀봤던 세대는 내가 마지막이다)

     

세 살 위의 사촌 언니가 집으로 놀러온 날, 거실 TV에서는 음악방송이 한창이었다. 그날의 1위 후보는 영턱스클럽의 <정>과 HOT의 <캔디>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영턱스클럽을 응원했지만 언니는 HOT의 팬이었다. 우리는 1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유치한 말다툼을 벌였다.

     

드디어 MC가 1위 곡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아랫배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신호를 감지했다. 이거 봐야되는데! 라고 소리치며 화장실로 달려가자마자, 닫힌 문을 넘어온 언니의 의기양양한 외침이 들렸다.

"니가 좋아하는 정이 졌다!"    


    

2022년 겨울, NCT드림이 <캔디>를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팬덤은 열렬한 환영의 의사를 표했다. 팬들의 충성도나 규모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이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히트곡이 없다는 점이 언제나 아킬레스 건이었기 때문이다. <캔디>의 이름값은 그 아쉬움을 불식시키리라는 믿음을 심어주고도 남았다.

     

전에없이 들뜬 드림 팬들을 보고 127(또다른 엔시티)의 팬인 나 역시 부러움과 씁쓸함을 느꼈다. 드림에도 좋은 곡들이 많은 걸 알아서 음반도 사고 음원도 자주 듣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배가 아팠다.

     

한편으로는 편곡을 맡은 켄지(SM의 유명 작곡가)가 원곡을 어떻게 요리할지, 파트 분배는 어찌할지 몹시 궁금했다. 내가 프로듀서라면 어느 멤버에게 어딜 부르게 했을까?

     

도입부는 무조건 해찬이다. 원곡 파트의 주인과 같은 포지션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난기 가득한 톤이 찰떡일 것 같다.

서정적인 멜로디로 접어드는 ‘머리 위로 비친 내 하늘 바라다보며~’는 런쥔이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의 보컬은 선율미를 가장 잘 살릴 것이다.

간주 구간에 문희준이 불렀던 ‘내게 하늘이 열려 있어~’는 천러에게 딱이다. 하이 노트에서도 예쁜 음색을 유지하는 천러의 목소리는 풋풋함이 필요한 곳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후렴, 가장 중요한 메인 멜로디는 보컬 세 명이 돌아가면서 맡으면 좋겠다. 셋 다 보이그룹 전부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미성이니까 각자의 아름다운 음색으로 불러주었으면.

     

이런 상상과 기대를 품고 음원 발매일만 기다리다 드디어 플레이 버튼을 누른 순간, 기쁨과 실망이 교차했다.다행히 기쁨의 순간이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찾아오기는 했다.


역시 켄지는 똑똑한 작곡가였다. 원곡이 이미 손댈 데 없는 좋은 노래라는걸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사운드가 입체적이고 현대적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오리지널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는데, 매우 영리한 선택이었다. 특히 원곡 특유의 비트감을 놓치지 않고 살린 점이 반가웠다.

     

놀랍게도 파트 분배는 내 예상과 거의 똑같았다. HOT와 NCT라는, 데뷔년도가 딱 20년 차이나는 두 그룹을 다 덕질해 본 나의 공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 있던 내게 실망을 안긴 건 싸비였다. NCT가 HOT보다 평균적인 보컬 수준이 더 높기에 노래 잘하는 멤버들의 유려한 독창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를 했건만, 세 번의 후렴을 모두 합창으로 채워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맨 마지막 ‘한번 더, 한번 더 말했지, 이제껏 준비했던~’ 구간에 모든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어가게 돼 있는데도, 굳이 앞의 세 번까지 합창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말의 아쉬움은 남았으나 드림 멤버들은 기대한 만큼 제 몫을 다해주었다. 녹음할 때 상당히 힘들었다는 인터뷰를 한 걸 보면 캔디가 들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곡인 듯 했는데, 그럼에도 모두 최선의 수행을 보여주었다. 특히 메인보컬 해찬은 코러스까지 도맡아 함으로써 노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SM에서 공개한 레코딩 영상에서 높은 음과 낮은 음을 오가며 거의 모든 파트에 화음을 넣는 그의 가수다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댄스곡이니 만큼 기존의 안무를 어떤 식으로 변형시켰을지도 관심사였는데, 공개된 안무 영상을 보니 원곡보다 훨씬 어려운 무브로 가득한 모양새였다. HOT는 물론 춤을 잘 추는 팀이었지만 캔디의 춤은 곡의 분위기에 맞춰 상대적으로 따라하기 쉬운 동작 위주로 짜여졌었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엔시티의 안무가는 원곡의 댄스 수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고난이도의 퍼포먼스가 만연한 현재의 케이팝에 길들여진 팬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엔시티의 안무 영상에는 이 상큼하고 귀여운 노래에 과분하다는 생각까지 들 만큼 테크니컬한 동작들이 넘쳐난다. 하긴 드림 멤버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춤을 너무 잘 추긴 한다.

     

리메이크된 음악과 퍼포먼스에 대한 대중과 팬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곡을 리메이크하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따르기 마련인데도 원곡의 장점과 NCT의 매력까지 잘 살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나 역시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캔디는 세월이 무상하게 또다시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음악방송이 아니라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은 NCT의 유닛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을 두고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다시 말해 엔시티가 캔디빨이냐, 캔디가 엔시티빨이냐의 문제였다.

    

전자를 주장하는 쪽의 논지는 이랬다. 대중성이 약점인 엔시티이니 캔디라는 메가히트곡이 아니었다면 음원 1위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도 다 아는 노래이니 오죽 유명하겠나.

     

후자의 반박은 이러했다. 아무리 캔디라도 엔시티가 아닌 다른 보이그룹이 리메이크했다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었겠나. HOT의 직속후배이자 거대한 팬덤을 보유한 엔시티라서 가능한 일이다.

     

나는 두 의견이 모두 옳다고 본다. 캔디 아닌 다른 곡이었다면 1위까지는 어려웠을 것이고, 인기가 덜한 팀이었다면 차트인 시켜 줄 팬덤의 규모가 부족해 대중이 음악을 들어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NCT가 HOT의 직속후배라는 점도 당연히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SM 소속 아티스트 중 최고참인 강타는 캔디의 발매를 기념해 열린 특별 이벤트에 MC로 참가하여 후배들을 지원사격했다. SM을 떠난 지 오래 된 토니 역시 직접 드림 멤버들을 만나 격려하고 챌린지까지 찍었다.

    

특히 강타가 참여한 스페셜 이벤트는 말그대로 특별한 구호를 내걸고 진행되었으니, 바로 엄마와 딸이 각각 HOT와 NCT의 팬인 가족을 모집한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중 가장 오래된 자사의 역사를 자랑하며 대놓고 세대 통합을 도모하려는 SM의 포부가 돋보이는 기획이었다.

    

사실은 나도 그 이벤트에 무척 참여하고 싶었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혼자만의 자격인 것이 문제였다. 내가 HOT 팬의 역할을 맡으려면 아이가 NCT 팬의 역할을 맡아줘야 했는데,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던 아이를 데리고 가서 우기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두 팀의 아이템을 다 들고 가서 들여보내달라고 조를까 하다가 관뒀다. 그리고 일상이 바쁜 나머지 해당 이벤트의 온라인 생방송을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그건 다시보기조차 안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스페셜 이벤트는 허무하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고, 음악방송 1위 후 멤버 마크가 밝힌 소감만이 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캔디를 리메이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시절 캔디를 좋아하셨던 추억이 있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신이 나서 캔디를 부르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스스로는 목격하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음악에 취해 흥겨워하는 모양새가 똑같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 아이도 멜로디를 넘어 노랫말의 의미까지 알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현재 아이돌 팬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0대 후반 ~ 20대 중반 팬들은 가사의 내용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들은 마침 사랑 노래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하기에 충분한 나이다. 원곡 발매 당시에 너무 어려서 가사를 곱씹어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들의 열띤 토론 덕에 캔디의 화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게 되었다.


어렵게 맘 정한 거라 내게 말할 거지만 사실 오늘 아침에 그냥 나 생각한 거야.

     

아직 어리구나.


햇살에 일어나 보니 너무나 눈부셔, 모든 게 다 변한 거야, 널 향한 마음도.


햇살이 눈부셔서 사랑이 변했다니,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순화 버전인가?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이제껏 준비했던 많은 말을 뒤로 한 채


막상 상대방 앞에서는 사랑한다고밖에 말 못한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는 건 아줌마가 됐다는 증거일까.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이렇게 약속을 하겠어, 저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신을 보며 활짝 웃는 환한 얼굴에 다시 사랑을 다짐하는 소년의 앳되 다부진 입매를 상상해 본다. 이 커플의 예쁜 사랑이 오래 가기를 염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