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Jun 08. 2023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건반을 달리는 손

- 피아노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





‘미래에서 기다릴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첫 문장을 보고 흑, 치아키... 하며 가슴을 부여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2006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평범한 여고생이 우연한 기회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로 명작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한일 양국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고, 훌륭한 작품이 흔히 그렇듯이 대단히 아름다운 OST로도 유명하다. 바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제목의 곡이다.

나 곡이 좋다 해서 악보가 쉬울 리는 없는 법. 특히 왼손의 도약(간격이 넓은 여러 음을 빠르게 뛰어넘어 치는 것)이 아주 많은데, 이를 미스터치 없이 쳐내는 게 매우 어렵다.

제일 듣기 좋아야 할 후렴구에서 왼손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해야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틀린 곳을 또 틀리게 된다.  분명 ‘시’인데 자꾸‘미’로 쳐버린다든가...

이 부분이 총 세 번 반복되는데, 맨 마지막으로 가면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건반 위를 펄쩍펄쩍 뛰어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왼손 옥타브(어떤 음에서 완전 8도의 거리에 있는 음을 같이 치는 것) 음계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하아.. 초보는 괴롭다.

나는 성인 여자치고도 손이 작아서, 1옥타브 (예를 들면 도와 그 다음 도까지)조차도 닿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펼쳐서 8개의 건반 위에 놓아봤자 엄지와 새끼손가락 끄트머리 1센치 정도만 간신히 걸쳐진단 말이다. 그런 내가 세 번 연속으로 등장하는 옥타브를 깨끗하게 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부분은 곡에서 가장 휘몰아치는 순간으로, 크레센도(점점 크게)를 살려서 아주 웅장하게 쳐야 한다. 이 테크닉을 제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듣는 사람이 감동받을 만큼 멋있게 칠 수 있다. 근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난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2절이 끝난 후 이어지는 간주는 곡 전체에서 제일 감동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포르테로 아주 힘차게, 성대하게 쳐야 제대로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구간이다.

그런데 이번엔 오른손 파트가 문제다. 화려위해 4개짜리 화음이 계속 등장하지만, 내가 손가락을 아무리 뻗어봤자 가장 아래 음과 가장 위 음에 가닿지 않는다.

평소에는 나의 손 크기에 불만을 가질 일이 없지만,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손 큰 사람이 너무 부럽다.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대작곡가이자 대피아니스트들은 손이 기형적으로 컸다고 한다. 나는 그분들과 달리 정상적인(?)손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연습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고백하자면 <변하지 않는 것>을 레슨 받고 연습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미스터치가 나온다.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래영화 속 주인공 마코토가 시간을 달리듯, 내 손은 건반 위를 달린다. ‘미래에는 잘 할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악뮤 노래가 왜 이렇게 웅장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