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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ul 14. 2023

솔도레의 부조리함

(오랜만에 피아노 치는 얘기입니다^^)


무대에는 은은한 노란빛의 스포트라이트가 내리쬐고 있었다. 내가 입은 원피스처럼 매끄러운 표면의 검은색 스타인웨이가 한가운데 서서 날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관객석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 누구의 얼굴이라도, 표정이라도 발견한다면 나는 한 발을 내딛을 용기조차 잃어버릴 것이다.     


오직 앞만 보고 전진했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남편과 아이도 저 어둠 아래의 어딘가에 앉아 나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을까. 선생님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계실까.     

 

흰 건반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흑단으로 된 검은 건반은 가늘고 긴 몸체를 과시하며 도발했다. 어서 손가락을 얹으라고, 어디 한번 때려보라고. 반들거리는 내 표면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냐며 자신만만해했다.      


그래, 그 오만함을 꺾어주마. 나는 열 개의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었다. 건반은 정확히 내 손가락보다 여덟 배하고도 여덟 개가 많았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시작.

엄지와 검지와 중지가 스타트건의 총성을 감지한 육상선수처럼 뛰쳐나갔다. 그리고.......


첫 세 개의 음에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솔도레였다. 바로 그 솔도레, 수 개월 동안이나 나를 괴롭혀왔던, 그 악마 같은 삼총사 때문이었다.     


차마 고개 돌려 바라보지 못한 오른쪽, 어둠의 바다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경악에 휩싸인 작은 비명과 측은해하며 혀를 차는 소리,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식은땀에 물든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나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내가 앉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엔 흰 건반이  비웃고 있었다.     


헉!!!!      


땀범벅이 되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곁에서 아이가 우웅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스포트라이트는 없었다. 눈에 익은 창밖의 밤하늘과 별빛과 옆 동의 불 꺼진 창문만이 보일 뿐이었다.     

 

꿈이었다.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책임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다른 학원에서 배울 때 원장님이 먼저 권유하셨다. 베토벤의 가장 쉬운 소나타일지라도, 아직 나는 그 수준이 되지 못한다며 주저했지만 원장님은 듣지 않았다. 그렇게 3악장을 고생스럽게 배웠고, 시간이 지나 그걸 거의 잊어버린 것이 아까워 지금의 선생님께 다시 배워보고 싶다 요청한 것이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몇 개월 동안의 지난한 레슨과 연습이 이어졌다. 아무리 취미라도 클래식 곡은 대충 배울 수 없었다. 선생님도 몹시 꼼꼼하게 가르치셔서, 하나를 연습해오면 다른 하나를 지적받곤 헀다.      


특히 그 유명한 주제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처음 나오는 세 개의 음, 솔도레가 잘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악장 전체에서 이 주제가 가장 중요하고 또 그중에서 솔도레가 제일 중요해요.”

그러나 그 세 음을 제대로 친다는 것의 기준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1. 갈수록 커지는 느낌이 나도록 솔부터 레까지 크레센도를 살려야 한다. 물론 가장 작은 시작음도 소리가 묻혀서는 안 된다.
2. 곧바로 이어지는 ‘미’가 종착지가 되도록 연속성 있게 쳐야 한다.
3. 스타카토가 너무 가볍지 않게 레가토가 아닌 느낌만 살려서 끊어서 친다, 등등.


지킬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단 세 개의 건반을 누르는데도 계속 실수를 했다. 건반 가운데를 쳐야 할 손가락이 마치 차선을 물고 달리는 앞차처럼 건반과 건반 사이를 내려쳤다. 작으면서도 명확한 볼륨으로 시작해야 할 ‘솔’은 희미한 소리만 내기 일쑤였다. 그러다 급기야 꿈까지 꾼 것이다.


“선생님, 이제 솔도레가 꿈에도 나와요.”

레슨 시작 전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했더니, 웃을 줄 알았던 선생님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위로했다.

“저도 한 번씩 이 곡 칠 때 솔도레가 마음대로 안 되면 곡을 통째로 망친 기분이에요. 반대로 솔도레가 잘 되면 그날 연주는 다 잘 풀리고요.”     


단 세 개의 음표가 곡 전체를 좌지우지하다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들은 그런 불합리조차도 감수하고 이 커다란 악기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는 것일까.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운 예술이지만, 그 이면에 숨은 노력은 때로는 비인간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냉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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