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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12. 2016

단 하나의 조언

조언하지 않는 사람의 한 가지 당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우연히 한 선배의 번호를 알게 됐다. 전 기수의 연락처와 메일 주소가 쭈욱 나열된 엑셀 파일에서 나는 한눈에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각디자인과 졸업. 현 카피라이터. 한때 비슷한 꿈을 꾸었고, 지금은 같은 꿈을 먼저 이룬 사람이었다. 아트로 지원하지 왜 카피로 지원했어. 그랬다면 광고를 더 빨리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말을 지겹게 들어온 터라 이 선배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됐다. 분명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6살 위의 선배였지만 왠지 지금 꼭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언제든 괜찮아요. 후배님 좋은 날짜 두세 개 정도 얘기해주면 그때로 맞출게요. 아, 제가 야근이 좀 많아서 그런데 혹시 저희 회사 근처에서 봐도 될까요?]


문자를 보낸지 얼마 안돼 곧바로 답장이 왔다. 뵙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하는 길을 내 의지만 믿고 가도 될지 수없이 고민하던, 8월의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양재역 근처에 있는 회사는 늦은 시간임에도 모든 층의 불이 켜져 있었다. 7시 반이 조금 지나서야 선배는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면 종류를 좋아한다는 말에 근처에 있는 맛있는 국수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사실 전 운이 좋은 케이스예요. 친한 친구들도 항상 그러거든요. 노력하는 거에 비해 얻는 게 많다고. 처음엔 아트로 입사를 했는데 후배님처럼 늘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안을 가져갈 때마다 카피까지 모두 적어갔거든요. 그걸 지금 팀장님이 되게 좋게 봐주신 거죠. 하루는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으면 정식으로 다시 시험 보고 들어오라고."


이대로 자꾸 연차가 쌓이면 카피라이터로 전향하는 게 더 어려워질 거라 판단한 선배는 다시 시험을 치러 재입사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카피를 쓴 장본인이었기에 성공담에 대해 가장 먼저 이야기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결 같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진 후배에게 선뜻 조언을 해주기가 꺼려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꼭 해 봐요, 그 말 말곤 해줄 게 없어요,라고 했다. 계속 생각이 나면 해봐야죠. 전 그랬거든요.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날 회사로 돌아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구나. 그렇담 됐다-


그로부터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지난 주, 가로수길에서 다시 만났다. 잠깐잠깐씩 보긴 했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 이직이 확정되어서야 겨우 잡힌 약속이었다. 그날도 선배는 한식을 먹고 싶다는 말에 어느 정갈한 밥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터라 가게 안은 고요했다. 어찌 보면 선배는 내가 이 길을 걷겠다 마음먹는 데 크나큰 몫을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 싶었다. 이 기쁜 소식을.


"잘 됐다. 꼭 하고 싶던 일이잖아. 해봐야지, 그럼. 야근도 많고 업무도 많겠지만 재밌을 거야. 그 시기엔 뭐든 즐거우니까."


그날도 선배는 조심스럽게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으며 말했다. 여전히 자신의 조언이 행여나 후배의 앞날에 큰 영향을 줄까 염려스러운 것 같았다. 합격한 거 다 선배 덕이예요,라는 말에도 그는 손사래를 쳤다. 이룬 것에 비해 항상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게 그 선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날은 묻고 싶었다. 당신의 길을 좇아가는 후배에게 반드시 꼭 해주고 싶은 말, 딱 한 가지만 해달라고.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나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훨씬 더 좋은 카피라이터가 될 거고, 훨씬 더 좋은 캠페인을 만들 거야. 말했다시피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이디어를 잘 내는 사람도 아니지만- 이건 꼭 말해주고 싶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글을 썼으면 해. 회의를 할 때, 가장 창피했던 순간이 언젠지 알아? 내가 카피를 딱 보여줬는데 다들 '이게 무슨 말이야?' 되물을 때, 그때가 제일 부끄러웠어. 그럴 땐 정말 귀까지 새빨개지는 느낌이야. 나 혼자만 알아듣는 글을 쓴 거니까. 우린 일기를 쓰는 게 아니잖아. 카피라이터에겐 그 말이 가장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지. 개인적으론 카피라이터든 작가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신입 때나 대리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이고. 멋진 글 말고 잘 읽히는 글을 쓰자, 특이하게 말고 자연스럽게 쓰자- 이걸 새겨뒀으면 좋겠네."


선배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참 쉽고도 어려운 일, 당연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 잘하고 싶어 자꾸만 단어에 두터운 옷을 입히고, 멋들어지게 만들고 싶어 자꾸만 문장에 무게를 실었다. 그건 과거에도 지금도, 아마 앞으로도 글을 다듬을 때마다 떠올려야 할 단 하나의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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