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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14. 2016

적응의 과정

오롯이 느껴보기


새벽 2시. 아침 일찍 눈을 뜨려면 한시라도 빨리 잠들어야 했다.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이라 자꾸만 노선을 확인하게 됐다. 어플에서는 30분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나왔지만 불안했다. 늦게 도착할 바에야 일찍 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알람을 5분 단위로 맞춰두고 나서야 겨우겨우 잠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섯 번은 족히 건너뛰었을 알람도 두어 번 만에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창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지 어둑어둑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푸석푸석 생기가 돌지 않았다. 아, 피부도 도와주질 않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들도 온통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보니 예정보다 10분 정도 늦게 집을 나서게 되었다. 참, 오늘은 왼쪽으로 가야 하지, 항상 오른쪽으로 가던 버릇이 아직까지 몸에 배어있었다. 익숙한 144 버스를 뒤로 하고 언덕 위 낯선 정류장으로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정류장에는 처음 보는 이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인사를 건네진 않더라도 항상 마주치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 시간에 볼 일은 없겠구나, 생각이 들자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이 조금 그립기까지 했다. 기분 좋은 설렘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신나기만 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찰나, 버스가 천천히 정류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시원시원한 미소를 가진 기사님이 반갑게 인사하시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쭈욱 둘러보니 원래 타고 다니던 버스보다 빈 좌석이 훨씬 많았다.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건너편에 앉은 비슷한 또래의 여자는 자세를 고쳐 잡곤 익숙한 손놀림으로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팔랑팔랑 페이지를 확인하더니 찬찬히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평온한 그녀와는 달리 나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풍경을 어색해하는 이는 달랑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아, 나도 저 사람들처럼 빨리 익숙해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반가워.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고스란히 다 같은 고등학교로 배정돼서 다들 친해. 너랑 저 친구들은 조금 낯설겠다. 신반포 중학교 출신이라고 했지? 새 친구는 나도 진짜 오랜만에 봐!"


13년 전 그날도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빨리 적응하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17살이었던 그때, 예상치 못한 고등학교 배정으로 수많은 동네 친구들을 뒤로 하고 두 세명 남짓 되는 친구들과 낯선 곳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당연히 S여고로 갈 거란 우리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중학생이 될 때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모두 같은 곳으로 진학을 했는데 이게 웬 일.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S여고를 두고, 버스를 타도 30분이 넘게 걸리는 M여고로 배정을 받게 됐다. 두 여고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스펙을 갖고 있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거리, 친구, 동네, 익숙한 게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야, 괜찮아. 막상 가면 금방 친해진다니까. 맨날 동네 친구들하고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등학교 가면 지금처럼 매일 매일 붙어 다니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나중에 나이 먹으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먼저 연습해본다고 생각하자, 응? 이 참에 버스 타고 학교도 다녀보고, 새로운 동네도 가보면 좋지. 안 그래?"


대학 입학을 앞두었던 언니는 하루 종일 저기압인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고깝게 들릴 리 없었다. 엄마도 나서서 거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닌 S여고로 배정받아서 내 마음 몰라, 거긴 M여중 애들이 태반이라고, 거기서 어떻게 적응을 하라는 거야, 눈 앞이 캄캄했다. 개학날이 다가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 아이들이 5명 정도 더 있었지만 정작 친한 아이들은 모두 다른 반, 같은 반인 아이는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일 뿐,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전학을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맞춘 교복은 개학날까지 빛 한 번 보지 못했다. 개학 전날 밤, 그때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괴로운 날이었다.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가 주길 바랐다.


만약 그때도 지금처럼 스스로 새로운 환경을 택할 수 있었다면 긍정적인 면을 훨씬 더 많이 보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마음고생도 훨씬 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코 앞에 있는 S여고를 배정받지 않은 덕분에 동네 밖 친구들을 처음으로 사귀어볼 수 있었고, 생전 가보지 않았던 동네의 핫플레이스도 줄줄이 꿰게 되었으며, 길치였던 내가(지금도 약간 그렇지만)  스스럼없이 버스도 타고 다니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든 세상을 보는 눈이 보다 넓어진 게 사실이었다. 당시엔 죽을 것 같이 싫었던 변화가 결코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연습해본다고 생각하자, 엄마의 그 말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을 걸. 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마음 졸였겠지만 내 스스로 새로운 환경을 택한 지금, 어릴 적의 내가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적응의 시간들을 조금 더 즐겨도 괜찮았을 텐데. 언제고 익숙해질 평범한 일상이었을 텐데.


잊고 있던 그때를 떠올리는 동안 회사 앞에 다다랐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기사님은 또 한 번 인사를 건네셨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곳곳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로 가득했다. 첫 등교를 하던 그날처럼 처음 타 보는 버스, 처음 가 보는 거리였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이 모든 것들에 언제고 적응하게 될 것이다. 눈 감고도 다닐 만큼 익숙해지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이 낯선 풍경을 최대한 즐겨보기로 했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이 길이 1달 뒤엔, 1년 뒤엔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 작년 이맘 때, 이곳에 입사했다는 선배님이 당부한 '초심', 그 마음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말고- 적응의 모든 과정들을 생생히 느껴보자, 어떻게든 긍정적인 변화로 소화시켜보자  마음먹었다. 세상에 나쁜 경험이란 없어. 그렇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 나쁜 거지- 어릴 적 누군가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자 나는 정말로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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