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말을 들려줄 여유는 갖고 살도록
서른 살. 결혼하기에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 친구들 사이에서도 중간쯤 되는 순서로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에 있어 크게 문제 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이따금씩 불쑥불쑥 나를 고민스럽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평범하지 않은 내 성격 때문이었다. 어떤 일에 집중하면 한도 끝도 없이 예민해지는 이놈의 성격. 행여나 그 일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이런 성격을 빠삭히 알고 있는 엄마는 매번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잘 먹고 잘 자고 다니라고. 감정이 요동치지 않도록 기본을 소홀히 말라고. 그런 너를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 가까이 살라고. 결혼하기 전, 5년 정도는 혼자 살았던 터라 이런 성격이 드러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매일 붙어사는 사람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염려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바로 그 주부터 아슬아슬 줄타기를 시작했다.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일이 몰려왔다. 전에 없던 TF팀까지 꾸려지고, 지금껏 일해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새로 호흡을 맞추는 일도 생겼다. 이런 일이 잦은 직업이라는 걸 모르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모든 게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졌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밥을 해 먹기는커녕 대화 몇 마디 나누기도 힘든 날들이 계속됐다.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물어놓고 그 몇 분 사이 까무룩 잠이 들기 일쑤였다. 남편 또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다시없을 신혼을 이렇게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울했다. 그토록 원하던 일인데도 없어서는 안 될 일상까지 갉아먹어버리니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세우게 되었는데, 어느 날엔가 그 가시가 남편을 향한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 풀지 못한 감정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만 것이다.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설사 내가 잘못한 일일지라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내 심정을 읽어냈는지 별 다른 말 없이 침착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랬어? 힘들었겠다. 괜찮아.'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땐, 며칠 동안 마음속에 꾹꾹 눌러놨던 응어리가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저 세 마디면 되는 거였구나. 하루 종일 저 말이 듣고 싶어서 나는 그렇게도 예민하게 굴었나 보나. 그 순간, 결혼을 왜 결심하게 되었느냐는 친구의 물음이 떠올랐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주고받는 사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나를 다독여줄 사람. 집으로 달려가면 그런 사람이 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친구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나는 그때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의 이런 예민한 성격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던 남편은, 일찌감치 나를 다독이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내 감정을 살필 여유 정도 정도는 늘 갖고 있는 것도 같다. 나보다 상대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마음은 여유 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이건 모든 부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온 맞벌이 부부가 산더미 같이 쌓인 집안일을 똑같이 맞딱들였을 때,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상대방을 살필 여유가 없다면 그것조차 엄청난 싸움거리가 되고 말 테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참 별 일 아니었는데, 여겨질 만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근래 조금씩 일이 빠지고 있는 나완 달리, 그는 야근이 잦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프로야근러로 살아갈 우리 둘에겐 피할 수 없는 일상이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할 그는 곧 시동이 꺼질 것 같은 힘없는 몸짓으로 벨을 누를 것이다. 그러면 한걸음에 달려가 그가 좋아할 말들을 골라 들려줘야겠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여유로운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앞으로의 날들도 조금 덜 힘든 사람이 조금 더 힘든 사람을 다독이며 살아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