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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22. 2019

동사형의 꿈

어느 드라마 속 대사로부터



지금껏 살아오며 내게 꿈이 없던 시절은 없었다. 다만, 꿈으로 인해 버거웠던 순간은 많았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해서, 지금보다 만족스러운 내가 돼야 해서. 나는 꿈이 있어 기쁘다기보단 힘겨운 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눈을 뜨고 하루가 시작되면 매 순간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꼬르륵, 하고 가라앉을 듯한 느낌. 버거운 깊이의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꿈꾸던 곳에 첫 출근 한 날을 기억한다. 합격이 정해진 날로부터 매일 축하 문자가 쏟아졌다. 이제야 기대했던 내가 된 것 같았다. 뭔가 대단한 걸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면 마음에 품고 있던 꿈 하나를 멋지게 성취한 듯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물 밀듯 밀려오는 업무와 언제 날아올지 모를 질책. 납득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몇 달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에게 쉴 새 없이 지적당하는 꿈. 그 끔찍한 꿈을 꾸는 동안, 오랫동안 품어온 꿈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저는 그냥 제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출근해서 대출금 갚고, 퇴근해서 맥주 마시며 축구를 보다 잠드는 것.
그렇게 제 집에서 살다 죽는 게 목표니까 꿈이겠네요 그게.

_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건물 밖을 나올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도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나서 다행이라고. 심장이 쿵쾅대고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은 있었어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은 없었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어느샌가 내 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나도 상황도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길 바랐다. 그게 행여나 기쁜 일일지라도, 이제 겨우 적응한 일상이 무너지는 게 두려웠다. 그저 주어진 일들을 별 탈 없이 마무리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 악몽에 시달리는 일 없이 무사히 눈을 뜨는 것. 나는 드라마 속 무미건조한 남자 주인공처럼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똑같은 나날을 보낼 거라 확신했던 어느 날. 마음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드는 문구와 마주쳤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나는 그 문구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었고, 이내 어떤 물음에 다다랐다. 내가 꿈꾸는 동사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보다, 듣다, 나누다, 여러 개의 동사를 떠올리다가 하나의 동사 앞에서 멈칫했다. '쓰다'였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그 익숙한 동사가 그날은 유난히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의 오랜 꿈은 사라졌다. 오히려 평범하다면 평범한 꿈을 꾸고 있다. 빈자리를 채운 꿈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생애 처음, 명사가 아닌 동사의 형태로 말이다. 오늘도 무사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쓰다가 하품이 쏟아질 때쯤 잠자리에 들길 바란다. 한 페이지 정도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길 바란다. 그 꿈만큼은 매일 이루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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