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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30. 2019

도망칠 때는 말이야

어느 만화 속 대사로부터



제법 쌀쌀해진 바람, 자꾸만 생각나는 뜨끈한 국물. 오늘에서야 또 하나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 가버린 게 아쉽기는 해도 그동안 나아진 것들이 있었다. 따끔거리던 구내염도, 무릎 위의 상처들도,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저만치 사라지고 없었다. 내 입가엔 '아, 이제 좀 살만하다'라는 말이 맴돌았다.



지난 며칠간, 힘겨운 날들이 계속됐다. 뚝 떨어진 혈압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도 심지어 뭔갈 마시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신경쇠약과 무기력증이었다. 의욕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괴로운 적은 많았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한 번도 내 이야기가 될 줄 몰랐던 상황이 삶에 치고 들어오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해내던 일도, 어떻게든 해내고 싶던 일도 안개가 낀 듯 뿌옇게만 보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결국 짧게나마 병가를 내기로 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지내왔다는 것, 그걸 잠시 멈춰야겠다는 것 말곤 뚜렷이 보이는 게 없었다. 바쁜 게 열심히 살고 있는 증거라고, 괴로운 게 더 나아지고 있는 증거라고 여기던 나를 저만치 떨어뜨려놓기로 했다. 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절친한 동생은 일단 멈춰보라고 했다.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나 혼자만이 겪고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겪은 사람들도, 여전히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줄 몰랐다. 그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서글프기도 했는데, 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병가를 낸 그날부터 오롯이 오늘 주어진 일들만 생각하며 잠들 수 있었다.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기억해야 돼.
언제든 달아날 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_만화 '밤하늘 아래'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날들이 잔잔하게 그것도 아주 고요하게 지나갔다. 모든 것들이 문제없이 잘 굴러갔다. 이제는 그 시간이 더 길어졌다 하더라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행여나 내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도망가야 할 타이밍에 도망가지 않으면 영영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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