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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16. 2019

그럴 자격

어느 배우의 수상소감으로부터



왜였을까. 대상을 수상한 어느 원로 배우의 소감에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진 건. 한동안 어떤 것들과 마주해도 별 감흥이 없던 나였는데. 그날, 한 번도 울컥한 적 없는 시상식을 보다가 별안간 울먹이기 시작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_배우 김혜자



이 말이 절실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한 문장 한 문장 정성껏 전한 말은 글이 되어 여기저기 실시간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문을 읽은 나는 한 개의 단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자격'. 아마도 이 단어가 나를 울컥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녀가 말하는 '그럴 자격'이라는 걸, 한동안 누려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흘려보내지 못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몇 번이나 과거의 그날로 돌아가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 그때 들은 말을 한 번이라도 되새겨봤더라면. 그때 받은 문자를 무심코 넘겨버리지만 않았더라면. 후회로 얼룩진 그날을 깨끗이 지우고 지워 반짝이게 만들려 할수록 안일했던 그날의 나와 마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불행했다. 쨍한 공기, 달큰한 바람, 노을의 냄새. 그런 것들을 잊고 살았다.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바삐 살았다. 그런 내게 어느 원로 배우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망치는 게, 후회되는 과거를 벌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고. 살아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노라고.



한동안 걷지 못한 길을 걸었다. 전보다 많이 울기도 했지만, 웃을 수도 있었다. 벚꽃이 피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에. 가끔씩 다시 후회가 밀려올 때면 부적처럼 그녀의 말을 떠올린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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