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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29. 2019

절망할 시간이 있다면

일본 드라마 속 대사로부터



오랜 친구들 중 유난히 부러운 친구가 하나 있다. 중학교 때부터 봐온 그 친구는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초조해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다. 학점 때문에 졸업이 미뤄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회사 선배가 매일 같이 못 살게 굴 때도 '뭐 어쩌겠냐'는 표정으로 대응할 뿐,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 별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 친구 인생 속엔 ‘위기상황’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반면, 나는 사소한 상황에서도 최대치의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였다. 일어난 일은 물론이거니와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모조리 눈 앞에 모아 두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정도면 뭔가 히뜩한 해결책을 찾아내야 마땅한데, 딱히 그러지도 못했다. 별 수확 없는 고민이었다. 그렇게 사소한 일로 끙끙대기를 여러 번, 한 번은 친구가 나를 붙들고 이런 말을 했다. 계속 생각한다고 달라질 일이었으면 벌써 그렇게 됐을 거라고. 그 정도 했는데 안 바뀌면 별 수 없는 거라고. 그다음엔 항상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

_드라마 '언내츄럴'



일드 속 주인공처럼 친구는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먹을 궁리를 했다. 신기하게도 그 대책 없고 속 편한 말이 나를 벼랑 끝에서 자주 구해주곤 했다. 지금 이 상황에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냐고 큰소리쳐놓고, 막상 가게에 들어서면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한 끼를 해치웠다. 한번 생각에 빠지면 끼니마저 잊어버리는 나에게 친구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고깃집을, 젊은이들이 자주 간다는 디저트 집도 알려주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면 세상 심각했던 일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언젠가 엄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는 일에 대해서는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민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잠시 미뤄두라고.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을 때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이고, 포근한 잠자리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고 나면, 나를 괴롭히는 일이 당장 해결되진 못하더라도 마음은 어느새 회복 단계에 접어든다. 일단 먹고 보자. 일단 자고 보자. 그러고 나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져 있겠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때로는 이 당연한 움직임이 꽤 많은 것들을 나아지게 한다. 최악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건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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