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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29. 2019

오늘의 색깔

THE BIG ISSUE KOREA 204



요즘 들어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듭니다. 엉덩이는 연신 들썩거리고 시선은 자꾸 창밖을 향해요. 점심 메뉴는 괜스레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고릅니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바깥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쐴 수 있는 장소로 정하는 것이죠. 선선한 저녁도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가게 앞 테이블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나면 "이 맛에 산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 순간, 그 자리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계절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이런 귀한 날씨가 1년에 몇 번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저는 '봄 앓이'를 심하게 겪는 편인데, 이 마음을 한순간에 식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남편의 단골 질문이기도 하지요.


"마스크 챙겼어?"


언제부턴가 남편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미세먼지 농도부터 체크합니다. 그 수치에 따라 차를 갖고 갈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데, 마스크는 꼭 잊지 않고 챙깁니다. 오죽하면 신발장 앞에 마스크가 박스째로 쌓여 있을까요. 이렇듯 남편은 미세먼지에 무척이나 예민한 반면, 저는 마스크 없이도 신나게 돌아다닙니다. 역까지 걷는 10분 동안의 풍경을 차 안에서 누리기엔 너무 아쉬워서죠.


'사계 시장'이라는 이름처럼 동네 골목은 계절마다 매번 다른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곧 봄이 올 거라는 건 과일 가게를 보면 알고, 곧 블랙 슈거 버블티가 유행할 거라는 건 카페 거리를 보면 알아요. 1년 넘게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출근하는 제겐 꽤 흥미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는데, 점점 그 낙을 빼앗기는 기분이 듭니다. 가게 앞에 곱게 진열돼 있던 것들이 하나둘 몸을 숨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판두부가, 이쯤에선 싱그러운 청포도와 딸기가, 이쯤에선 델리만쥬에 버금가는 빵 냄새가 풍겨야 하는데 어쩐지 그 모든 것들이 시들해진 느낌이에요. 어떤 땐 가게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로 오늘의 날씨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어딘가 황량해 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미세먼지 앱엔 '매우 나쁨'이 깜빡이고 있지요.



'Sinteplast Campaign' <출처: www.adsoftheworld.com>



“SAVE THE COLORS OF NATURE."


시장이 품고 있던 색깔도, 시장 너머로 보이던 하늘의 색깔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인쇄 광고 속 색상표들과 닮아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네요. 별 감흥 없는 색깔들과 마주하는 날이 반복되다 보니 주변을 살펴보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게 되고, 당장 쓰지 않더라도 마스크를 챙겨 다니게 되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시장 골목도 그저 출근을 위해 오고 가는 골목이 되어버렸지요.


이번 주말, 오랜만에 미세먼지 앱에 '최고 좋음' 표시가 떴습니다. 남편은 별다른 일정이 없는데도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합니다. 날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모양이에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에 갈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다를 보러 갈까 고민합니다.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니 덩달아 신이 나네요. 연애 때는 1만 보든 2만 보든 함께 걸어주던 남자 친구가 언제부터 차 없인 못 다니는 남편이 되어버렸는지. 날씨 탓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이 날씨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시장 곳곳에서 마주한 고마운 색깔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앞으로 찾아올 '오늘의 색깔'이 꼭 오늘 같기를. 사람은 결코 만들 수 없는 빛깔에 하루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 "와아"하고 탄성을 내뱉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풍경이 한동안 미뤄뒀던 다짐의 계가기 되어주기를. 가령,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에 과감히 도전하거나 보고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한잔하자고 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마음 여린 우리에겐 날씨라는 좋은 핑계가 늘 필요하니까요.




*이 글은 더 빅이슈 코리아 204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더 빅이슈 코리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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