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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04. 2016

새해 첫 진료

자꾸만 찾게 되는 그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그분


내 신체 중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눈'이다. 정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시킨다. 잠들기 직전까지 편히 쉬게 하는 법이 없다. 선명하게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유독 커서 10시간 이상씩은 꼭 렌즈를 착용하는데, 조금 무리한 탓인지 작년, 갑작스레 눈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조금만 무리해도 실핏줄이 터지고, 온갖 수분을 다 빼앗긴 듯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교정 렌즈, 산소 투과율이 높은 것들로 교체해봤지만 똑같은 소프트 렌즈라 그런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작년 봄, 하드렌즈로 바꿔야겠다 싶어 제법 큰 규모의 S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마자 눈 상태를 확인해보기 위해 새해 첫 진료 예약을 했다.


"저쪽으로 가세요."


담당 교수님께 진료를 받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들이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똑같이 번호표를 뽑고, 진료과목을 이야기하고,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 정밀 검사실로 향했다. 안과를 찾은 모든 사람들이 필히 거치게 되는 곳이었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시간대를 택했음에도 검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개 이맘때쯤 되면 데스크에 있는 안내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데, 오랜만에 보게 된 그녀는 오늘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방향만 대충대충 알려주고 있었다. '나 오늘 일 많이 했으니까 말 시키지 말아줘' 표정만 봐도 느껴졌다. 이 수많은 사람들을 케어하려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그녀가 건네준 안내표를 받은 후, 검사실로 향했다.


질문 하나를 하기에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들어서는 곳이 바로 검사실이었다. 그분, 오늘도 계신가,라는 생각을 하며 대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힐끔힐끔 검사실 안을 들여다봤다. 그때 커다란 문이 벌컥 열리며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새하얀 머리에 새카만 안경, 커다란 키의 선생님이 '다음 분이요~'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 오늘도 계시는구나, 그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놓였다. 30분쯤 기다렸을까. 앞에 있던 긴 줄이 조금씩 줄어들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때 양 손에 짐을 잔뜩 든 40대 남자분이 황급히 달려와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먼 곳에서 오신 분 같았다.


"나 검사 하나를 빼먹었는데. 지금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오늘 오후에는 병원 진료 말곤 아무런 스케줄이 없는 나는 아, 먼저 하세요 순서를 양보했다. 이 여자분이 먼저인데요, 선생님이 말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10분 정도가 흐르고, 다시 내 차례가 됐다. 짐을 챙겨 서둘러 검사실로 들어갔다. 수많은 도구들이 줄 지어 놓여 있는 그곳은 늘 어둑어둑 불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몇몇 차트들만이 희미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선생님이 방금 쓴 도구들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검사실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고 있었다. 눈 건강을 위한 10가지 팁, 이거 작년에도 읽어봤었는데. 선생님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한 번 확인하시곤, 넌지시 질문 하나를 던지셨다.


"음, 혹시 이 병원 분이시던가요?"


"아뇨 아뇨. 저 거의 5개월 만에 왔어요. 진작 왔어야 되는데."


"아, 병원을 낯설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병원 분이신가 했어요. 어째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고. 자자, 여기 앉으세요. 기계 알코올로 한 번 닦아드릴게요."


족히 스무 살 이상은 어릴 나를 오늘도 참 정중히 대해주셨다. 말 하나하나에 정성이 묻어난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전에 왔을 때도 같은 걸 느꼈다. 몇 번 와본 적 없는 이곳이 익숙해 보였던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들어설 때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염려스러웠지만 이 친절함 덕분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어느샌가 마음이 차분해졌다. 알코올로 닦아낸 부분이 마를 동안 선생님은 잠시 기지개를 폈다.


"마를 동안 잠깐 기다립시다. 아휴~ 벌써 다섯 시네요? 새해 첫 출근인데 아직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이렇게 서있기만 했습니다."


긴장이 조금 풀리셨는지 잠시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놓으셨다.


"저녁 시간이 다 돼가는데, 여태 못 드셨어요? 아이고- 저번에 왔을 때도 되게 바빠 보이셨는데. 이 병원은 항상 이렇게 사람이 많네요."


"네, 딱 출근하면 그때부터 전쟁인 거예요. 끝이 보이질 않죠. 다음 분, 다음 분, 하다 보면 어느 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으니까요. 이 나이 먹고도 여전히 이 일이 나한테 맞는 건가, 자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소탈하게 허허 웃으셨다. 그리곤 다시 노란빛이 도는 안약을 챙겨 오시더니 조심스레 내 두 눈에  한두 방울 넣어주셨다. 현미경처럼 생긴 도구로 찰칵 찰칵 사진을 찍었더니 시커먼 화면에 내 동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선생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진지한 얼굴로 조근조근 설명하셨다.


"자, 봐봐요. 여기 윗 부분에 뿌연 거 보여요? 여기 여기 실핏줄 터진 것도. 이게 다 렌즈가 눈이 숨 쉬는 걸 콱 막아버려서 그런 거예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10시간 넘게 너 어디 한 번 굶어봐, 죽도록 혹사시키고 있는 것과 같아요. 렌즈가 익숙해진 건 알겠지만 계속 이러면  안 돼요. 큰일 납니다. 자, 다른 약 넣고 다른 각도로 한 번 보여드릴게요. 아이고, 이거 평생 써야 되는 눈을. 렌즈 착용시간 딱 절반만 줄입시다. 그것부터 시작해봐요."


4-5개 되는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지금 눈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거듭 설명해주셨다. 어둑어둑한 이 공간에서 가장 빛나는 건  군데군데 있는 도구들도, 차트들도 아니었다. 조금 닭살스러운 표현이지만 내겐 선생님의 눈빛이 그랬다. 왜 점심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 알겠죠, 아가씨? 3주 뒤 검사 때 또 비슷한 상태면 절대 안됩니다. 그땐 더 독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잘 회복시키면 괜찮아질 거예요. 잘 회복시켜야 합니다, 잘."


검사실 문을 나서기까지 내 두 눈 걱정에 한시도 말을 멈추지 못하셨다. 네네, 대답을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꼭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내 뒤를 쫓아 나오던 선생님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셨다.


"아, 선생님,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요. 선생님한텐 이 일이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눈 잘 회복시키고 오겠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칭찬인 거죠, 하며 웃으셨다. 다행히 내 두 눈은 그리 절망스러운 상태까진 아니었다. 수납을 마치고 처방전을 챙기며, 검사실을 다시 한 번 돌아봤다. 내 다음 차례로 들어갔던, 근심 가득했던 환자분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지금 저분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생각했다.


어느 새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반짝반짝, 어둠 속에서 빛을 뿜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진료를 마친 사람들은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고, 엉켜있던 차들은 빛을 따라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냥 흠뻑 빠져버리는 일, 그런 것을 만난 사람들은 저 불빛들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직업에 관계없이, 내가 만나 온 모든 이들이 그랬다. 그리고 새해 첫 빛을, 나는 오늘 이곳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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