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실험하던 날의 짧은 순간

좌절그만!

by 김다정

똑!

실험에 쓸 재료인 석영 슬라이드 글라스가 깨진 소리이다. 그래, 아마도 당신도 초중학교 과학시간 어느날 보았을 그 슬라이드다.

내 슬라이드는 다른 용도가 있어 긴 모서리에 8개씩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손상이 있다보니 조금더 깨지기 쉽기는 하다. 애초에 ‘소모품’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럴수는 없는거다. 이렇게 직접 만든 수제 슬라이드는 만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다. 지금 깨먹은 슬라이드는 네덜란드 포닥 S가 만든, 실험하기 아주 좋지만 몇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슬라이드를 몇번이고 재사용하다보니 면도칼로 이물질을 제거해주는 과정이 있다. 이때 무리를 하면 슬라이드가 깨지는 것이다. 무리하고 싶지 않다면 2주정도 주방세제에 담아 불려두기만 하면 된다. 겨우 2주를 못참고 나의 손기술이면 잘 할 수 있을거라 자만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슬라이드 글라스.png
도루코 면도날.jpg
나의 소중한 슬라이드와 면도칼

순간적으로 똑 소리를 듣고도 가장자리가 부서진 것은 아닐지 기대를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안쪽부분이 아주 말끔하게 잘린 것이다. 깨질까봐 일부러 실험대에 내려놓고 조심조심 했건만.. 애초에 실험대에 이물질이 많았던 것 같다. 그냥 내일할걸. 아니? 다음에 더 불린 후에 할걸. 아니면 나 퇴사하고 후배보고 하라고 할걸.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내가 왜 지금했을까.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왜 잘못을 하고서야 후회를 하는가. 이렇게 괴로워할거면서 도대체 왜그러는 걸까!!!

결국 오늘은 슬라이드와 관련된 과정을 모두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한번 문제가 생기면 그날은 계속해서 점점 더 큰 사고를 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만은 많은 실수를 반복한 끝에 체득한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안다. 어느정도의 도전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다양한 조건으로 자기주도적으로 연구도 진행해보고,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씩 내가 너무 다른 사람에 비해 과격한가?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보다 많은 연구실의 학생들이 ‘실험이 망할까봐’ 시작하는걸 두려워한다. 물론 실험은 망하는것이고 처음에 성공하면 더 의심해봐야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굳이 모험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안전한 방법을 아는데 굳이 시험해봐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꼭 슬라이드 클리닝을 바로 했어야 하는 것일까.

슬라이드 하나깨먹고 여기까지 반성을 해본다. 앞으로도 자주 모험하고 종종 후회와 반성을 거듭하겠지만 그만큼 성장하길 바라며. 무엇이 더 소중한지(ex. 오늘 슬라이드 세척을 마치는것 vs 내 슬라이드가 깨지지 않게 아끼는 것) 현명하게 판단할 줄 아는 연구자가 되어있는 언젠가를 그려본다.


사진출처

1. 슬라이드 글라스 www.sigmaaldrich.com

2. 면도칼 www.dorc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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