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엄마는.... 바로 나였다.
(8편에 이어서.)
꼬깃 꼬깃해진 내 연습용(?) 메모를 다 읽으신 엄마의 표정. 마치... 음... 어떻게 묘사를 해야 할까. 십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의 그 표정을 기억할 수 있지만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냥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난 엄마가 경악을 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틀렸다. 엄마의 얼굴에서, 무거움과, 나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리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는 긴장감을 품은 눈동자가 기억이 난다. 나를 위해 무언가 하고는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하는 그 표정. 엄마는 다행히도 내가 일러준 대로, 날 안아주셨다. 그리고는 등을 쓰다듬어 주시며,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다. 엄마의 목소리와, 나를 안아주는 엄마의 그 팔에서, 나는 엄마의 긴장감을 한가득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난, 성폭력을 당했던 경험을 남에게 이야기할 때 종종 이 방법을 쓴다. 내가 기대하는 상대방의 반응을 미리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조금 듣기 힘든 이야기를 할 텐데, 난 이제 아무렇지 않은데 듣는 사람들은 좀 힘들어하더라고... 근데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마. 내겐 이제 별거 아니니까:)"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란 말은 터부시 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쑥, "나 성폭력 피해자야~"라고 이야기를 하면, 웬만큼 내공이 쌓이지 않은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고.. 유치한 사람들은 동정하게 되더라. 그 반응들에 오히려 내가 더 찝찝해지고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미리 일러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대방이 동정을 할 때, 굳이 말로 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상대방의 기운이 느껴질 때, 가장 불쾌하더라.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엄마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내가 뭐라 뭐라 말을 한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는 않고... 아마도,
"엄마, 근데 나 이제는 괜찮아. 엄마한테 얘기하고 싶었어. 근데 나 이제는 괜찮아."
뭐 대략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나보다 덩치가 작은 엄마의 품에 너무 많은 짐을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 굳이, 내 피해 사실을 엄마한테 말하고 난 이후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좀 아이니컬하긴 하다.
눈물을 닦으며 엄마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엄마는 이미 너덜너덜 해져버린 내 메모를 화장대 가장 아랫칸 서랍에 넣으시고는 이야기하셨다.
"사실 몇 년 전부터, 혹시 너한테 그런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은 했었어. 네가 서울로 대학을 가고 네 오빠도 서울에 있었으니까, 혹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네가 오빠 얘기를 할 때마다 표정이 안 좋았으니까. 근데 엄마가 못 물어봤어. 가끔 널 만날 때마다, 물어볼까.. 싶다가도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말을 안 꺼내는 게 너한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엄마가 먼저 아는 척하는 게 너한테 더 상처를 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
"아...! 아니야 엄마. 나 대학 가고 나서 일어난 일이 아니야. 그땐 아무 일도 없었어. 난 다 컸으니까. 나 어릴 때, 10살 때부터 11살 때까지... 그때 일어난 거야. 그리고 나 학교에서 상담도 다 받고 해서, 나 괜찮아. 지금은 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냥... 그냥... 얘기하고 싶었어."
"잘했어. 얘기해 줘서 고마워. $%&^$*%@%#^ (무슨 말을 더 하신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근데 00야, 사실은 엄마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너한테만... 그런 일 일어난 게 아니야. 사실은 엄마도... 그런 일 겪었어. 어릴 때."
.......!!!
한... 3초? 4초? 내 머릭 속이 텅---- 비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엄마도... 라니. 엄마가 어릴 적에? 엄마도 이런 일을 겪... 었어?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 업 되면서 장면이 잠깐 멈추는 것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도, 내 시간도, 엄마와 함께 앉아 있는 그 안방에서 잠시, 잠깐... 멈췄다.
그 짧지만 어두운 정적을 깨고 내가 물었다.
"... 엄마도? 엄마도 겪었어? 누가? 누구야?"
엄마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지며 엄마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너네 외할아버지가 엄마 어렸을 때..."
난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야, 덩치가 더 큰 내가 나보다 작은 엄마를 끌어안으니, 이제야 뭔가 자연럽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바람처럼 빠르게 휙 스치고 지나갔고, 바로 뒤이어 다급하게 터져 나온, 예상보다 크게, 어쩌면 살짝은 다그치듯이 터져 나온 나의 목소리.
"엄마! 엄마 괜찮아! 엄마! 별거 아니야. 괜찮아!"
엄마를 안고 엄마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여자가 나보다 더 불쌍하구나.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내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여기 나보다 더 불쌍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난 엄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그녀도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와, 무언가와, 또 자기 자신과 싸워가며 성숙해 온 어른이니까. 누군가가 타인을 동정한다면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오만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격해질 대로 격해진 내 감정을 솔직하게 옮긴다면, 정말 그랬다.
'이 여자는, 자신이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추행을 당하고 이제는 자신의 딸이 또...'
옛날에는 성에 관해 훨씬 더 보수적이고 무지했을 테니...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말로 다 표현을 못할 만큼, 힘들었겠구나... 괜찮은 듯, 아무렇지 않은 듯 가면 쓰고 사는 삶도 참 무거웠겠구나...
그러면서 나에게 너무나도 좋았던, 친구같이 편안했던, 최고의 할아버지였던, 이미 돌아가신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했어. 오늘 처음 너한테 얘기하는 거야. 네 아빠한테도 얘기하지 못했고... 그냥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 네 아빠한테..."
"아니야 엄마, 그거 미안할 일 아니야. 전혀 아니야. 엄마, 말해줘서 고마워. 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 괜찮아. 우리... 우리 괜찮아."
'우리'...라는 말을 썼다. 그래, '우리'. 엄마와 나.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우리'의 잘못으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나눴고, '우리'는 정말. 이제. 괜찮았다.
'우리'는 웃었다. 마주 보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마주 보고 웃었다. 슬슬.. 멋쩍어지기까지 했다.
"00아, 근데 아빠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자. 아빠는 남자고, 잘 이해 못할지도 모르고, 괜히 알려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고..."
"응 엄마. 나도 아빠한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엄마만 알고 있어도 돼. 나 괜찮아."
엄마의 의견에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난 아빠를 아빠로서 좋아하지만 엄마와 나의 사이처럼 스스럼없는 친구사이로는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에게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야기 한 이상,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랑 마주 앉은 채 깎아 놓은 사과 조각을 입에 물고,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분명 우리의 얼굴은 눈물 콧물의 폭풍우가 지나가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TV를 보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 이후에 후식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다. 이상하리만큼 갑작스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좀 더, 개운한, 일상.
철컥 철컥!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
"00이, 왔나?" 아빠가 돌아왔다. 엄마랑 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빠를 맞이했고, 아빠는 오랜만에 집에 온 나를 반가워하시다가,
"근데, 울었나? 니랑 엄마랑 얼굴이 와그라노 (= 왜 그러니)?"
"응, 드라마 보다가."
"아이고... 얼라가 (= 어린 아이니)?"
이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다. 폭풍우가 치던,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다시 잠잠해진 그날 밤이 이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난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며칠 뒤,
아빠의 전화. 잠깐 집에 내려오라는 아빠의 전화가 왔다. 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엄마도, 자신의 불행했던 한 조각을 끄집어내어 던져버릴 자유가 있으니까.
To be continued...
:)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
상처의 상처 다움은 '돌이킬 수 없음'에 있다.
...
상처받지 않는 것들은 치유될 수도 없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中/ 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