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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Mar 11. 2018

8.성폭력 피해자의 애인과 부모, 그들의 역할(1)

: 가장 나누기 힘든 사람=가장 나누고 싶은 사람

10-11살 때의 성폭력 피해, 23살 때 상담 시작, 25살 때 가해자인 오빠에게 사과받기까지.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불가능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끝냈는데...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찜찜했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 한 조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밥을 든든히 먹어서 배는 고프지는 않지만, 후식을 기다리는 욕심? 방 청소를 다 했는데, 서랍장 아래 먼지까지 치우고 싶어 하는 완벽주의? 살짝은 유치한 인정 욕구?... 잘 모르겠다.


그저... 부모님한테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딱히 바라는 것도 없었는데, 그분들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 이런 일 겪었어요... 나 위로해 주세요...'


뭐 이 정도밖에 할 말도 없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절실하게 부모님에게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상담 선생님에게 이런 나의 욕구를 말씀드렸더니 그다지 권장하지는 않으셨다. '해도 되지만 뭐 굳이...' 이 정도? 아마도 부모님에게 말을 하는 것이 피해자인 내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정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 확신하지 못하셔서 그러신 것이겠지.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도 사촌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주인공을 그녀의 엄마가 뺨을 때리며 되려 비난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아마 상담 선생님은 그런 경우를 염두해 두신 거겠지. 그래서 나를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으셨지만 권장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다. 상담이 다 잘 끝난 마당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한번 시작하면, 실패를 하더라도, 반드시 끝을 확인해 봐야 하는 성격이기에, 난 가장 힘든... 부모님라는 산을 넘고 싶었다. 이미 친구들에게도, 수업시간에도 나의 성폭력 피해를 다 이야기한 상황이었지만 부모님에게는 말을 꺼내기가 참... 힘들었다. 살면서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부모님에게 알리기가 가장 꺼려지지 않는가. 더구나 성폭력 피해, 오빠에 의한 피해라니. 자식 중 하나가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자식이 피해자가 되는 그 사실을, 그 어떤 누구라도 부모에게 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게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두 분이 충격으로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었다. 내가 알고 있던 (안다고 생각하고 있던)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육자로써 고지식하고 특히 성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분들이기 때문이다. 119에 미리 연락을 해 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날짜를 잡고 엄마에게 연락을 해서 할 말이 있으니 집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 후로,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아서, 1년에 명절을 제외하고는 몇 번 집에 내려가지 않던 나였기에 엄마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눈치였다.


그렇게 부모님을 만날 날짜를 잡고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연습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할까, 어떻게 시작을 할까,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할까. 마치 연극을 준비하듯 며칠 동안 시나리오를 짰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여러 편 준비했고 어렵게 결심한 기회인데 시나 잊어버리고 미쳐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을까봐 하고 싶은 말들을 종이에 빼곡하게 적고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연습을 했다. 그 종이를 꼬깃꼬깃 주머니에 접어 넣고 집으로 내려가는 기찻 속에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이 늦도록 집에 오지 않으셨고, 엄마와 내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간.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짧게는 며칠 동안 기다려온, 길게는 10여 년을 기다려온 그 순간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는... ‘부모님한테 알리기’라는 나만의 마지막 미션을 거의 포기해 버렸다.


후식으로 사과를 깎고 있는 엄마를 뒤로 한채 베란다로 나가서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도저히 얘기 못하겠어. 엄마한테 도저히 얘기 못하겠다.... 근데 있잖아, 나 얘기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나 이제 많이 괜찮아졌으니까....”


“아니. 너 얘기해야 해. 너 지금 얘기 못하면 평생 얘기 못한다. 내가 널 알아. 넌 얘기 안 하면 평생 힘들어할 애야. 얘기해. 얘기해야 해. 너 준비 많이 했잖아.”


휴대폰 넘어 들려오는 남자 친구의 단호한 목소리. 알고 지낸 지 3년이 넘어가던 남자 친구. 나 스스로보다, 어쩔 때는, 나를 더 잘 안다고 느껴지던 남자 친구의 단호한 목소리가 주춤거리며 멈추려고 했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래, 맞다. 난 부모님께, 만에 하나 버림을 받게 되더라도,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만큼 절실하게 이야기가 하고 싶었고, 하지 않으면 내 삶을 깔끔하게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난 엄마 앞에서 입을 떼었다.


“엄마 있잖아... 지금부터 내가 굉장히 듣기 힘든 이야기를 시작할 건데... 엄마, 내 이야기 다 들으면 다른 말은 할 것 없고... 그냥 나한테 꼭 이렇게 얘기해 줘야 해. 꼭... “미안하다. 00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꼭 이렇게 얘기해야 해 알았지? 그리고는 날 안아줘야 해. 알았지? 다른 거 말하지 말고, 다른 거 안 해도 되니까 꼭 나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날 꼭 안아줘야 해. 꼭.”


이렇게 난, 사과 접시를 가운데 두고,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스텝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나의 완벽한 시나리오에는… 왁! 하고 터져버린 내 눈물과, 쏟아져 나온 나의 눈물 콧물 때문에 조절되지않는 호흡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말이 꼬여버리고 연습했던 순서도 꼬여버리고… 내가 울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내 주머니 안에 있던꼬깃꼬깃 해진 종이를 발견하고는 그냥 읽었던 것 같다. 뭔가 브레인스토밍을 한 것 처럼, 마치 낙서처럼 잔뜩 지저분하게 쓰여 있는 나의 시나리오를 엄마가 읽으셨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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