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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Apr 15. 2018

11.성폭력 피해자의 가족의 역할(4)

: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행복을 위해

(10편에 이어서)


엄마가 지붕의 한 끄트머리에 걸쳐 앉아 있다. 절 같기도 하고.. 그냥 한옥집 같기도 하고.. 아무튼 처마가 있는 지붕이었고 새벽 즈음이었는지 하늘은 조금 뿌옛다. 엄마는 그 높은 지붕에서 바닥을 향해 무언가를 계속 집어던지고 있다. 패대기를 친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엄마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안은 채 울면서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던지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내 오빠의 물건들이다. 어릴 적에 쓰던 담요, 장난감, 학용품 등등. 엄마는 울음에 일그러진 얼굴로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오리... 마치 목욕탕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만한 고무 오리였던 것 같은데... 엄마가 마지막으로 그 장난감을 집어던지려고 했다. 그때 내가 다가가 그 오리 인형을 쥐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안 그래도 돼. 그러고 싶지 않으면, 안 그래도 돼. 난 괜찮아. 그거 계속 갖고 있어도 돼."




2005년 성폭력 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 내내 경험했던 신기한 일 중 하나가 바로 꿈이다. 처음에 상담 선생님이 상담은 주 1회라고 하셨을 때, 속으로 '조금 더 자주 하면 안 되나? 더 자주 하면 더 빨리 좋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상담을 시작해 보니, 실제 상담은 주 1회였지만 일주일 내내 상담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상담이 주 1회 이상이었다면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감정들을 소화해 낼 시간이 부족해서 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번 상담을 받고는 그다음 상담 날까지 일주일 동안 계속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느낌. 혼자서 생각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공책에 정리해 보는 시간도 갖고, 또 꿈고 많이 꾸고... 


정말 쉴 새 없이 꿈을 꿨다. 원래도 꿈을 종종 꾸기는 하지만 상담을 받는 몇 개월 동안은 총천연색의 꿈을, 그것도 상당히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꿈을 끊이지 않고 꿨었다. 위의 내용이 그중 하나이다. 저 꿈을 꿀 즈음이 아마도 내가 성폭력 피해자고, 그 가해자가 오빠라고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한 이후일 것이다. 피해자인 딸을 위로하면서도 또 다른 자식인 아들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있으셨을 것이고, 아마도 내가 부모님의 그 심정들을 마음속에 그려본 것이 내 꿈에 저렇게 묘사가 된 것이 아닐까. 나를 사랑해 주시는 마음이 감사하듯이, 나 역시 그분들이 갖고 있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마음들을 존중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는 별개로 말이다.


날 위로해주신, 내 편이 되어주신 부모님에게는 참 많이 감사드린다. 한편으로는 참...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니까.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에서 보면 피해자인 여성을, 딸을, 조카를 오히려 비난하고 입 다물라고 종용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지 않나. 지금 MeToo 운동에서도 얼굴과 실명을 다 밝히며 용기 낸 여성 피해자에게 오히려 2차 가해를 가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고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좀… 미안한 마음(?)도 든다. 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나와 같은, 유사한 피해 경험이 있으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분들 중에는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해 계신 분들도 많을 테니까. 나만 운이 좋아서 부모님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친족 성폭력피해자가 스스로를 보고 운이 좋다고 하는 말이 듣는 이에 따라서는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피해자 중에서 가족의 위로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 있고, 특히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는 더욱 더.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넘겨짚어 가며 없었던 일을 마치 내 경험인양, 마치 더 불행한 일을 겪은 것처럼 가장할 수는 없으니까.


영화 [여자, 정혜] 속의 정혜는 어릴 적 고모부에게 성폭력을 당한 이후에 우울하고 메마른 삶을 살아간다.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이 두꺼운 가면을 겹겹이 쓰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느 날 정혜는 그 가해자인 고모부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공원으로 불러낸다. 약속 장소로 가기 전에 정혜는 자신의 손가방에 손수건으로 감싼 칼을 숨겨서 나간다. 그 손수건도 마치 정혜 마냥,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손수건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고모부는 몸을 앞으로 굽힌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다. 정혜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정혜는 고모부를 죽이기 위해, 적어도 상해를 입히기 위해 칼을 준비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벤치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고, 허둥지둥 자리를 뜨다가 결국 자신이 준비한 칼에 자신의 손을 베고 만다.


내가 아는 한 언니는, 삼촌에게 성폭력을당했던 그 언니는, 그 장면을 보고, ‘그것 봐. 결국은 네가 다치잖아. 이제 와서 뭘 하려고 해 봤자 너만 다칠 뿐이야.’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그럴 수도 있다. 친족 성폭력과 같이 특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 더 다칠 수도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있기에 피해자에게 그 어떤 조언도, 옳고 그름의 기준도 함부로 제시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여자, 정혜]를 보고느꼈던 것은, 정혜는 그렇게 가해자 앞에서 칼을 꺼내보지도, 위협해 보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정혜는 그 사건 이후에 변한다. 스스로 마음을 조금씩, 아주 더디고 서툴더라도 조금씩 마음을 열 여유를, 용기를 찾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다 하여 매듭을 한번 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가 아닐까. 비록 남들 눈에는 “뭐야, 그 오랜 세월을 괴로워했으면서 고작 저거 한 거야?”, 혹은 “저게 뭐야.. 너무 무력하잖아.” 하면서 답답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피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무리’라는 것도 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사람의 성격에 따라 기준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운이 좋다면 운이 좋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상황에서,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본 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했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잃을지도 모르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 무엇인가를 다 잃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당해 낼 마음이 섰을 때… 그때 움직여야, 후에 많은 것들이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더라도 버텨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엄마. 나이 50이 넘어서 처음으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낸 여성. 그녀를 위해서 내가, 같은 아픔을 겪었던 동지로써,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를 생각했다. 엄마에게 상담을 받으시라고 권해보기도 했으나,


"동네가 좁아, 이 곳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는걸,한 사람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데, 그리고 너네 아빠가 이곳 유지잖아. 사람들이 곧 다 알게 되지…그리고 엄만,  괜찮아. 아주 오래 전의 일인걸.”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래, 엄마가 감당해야 할 것은 나와는 또 다르니까, 엄마는 내가 아니니까 강권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엄마를 위해,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이메일을 보내서 문의를 했다. 나와 엄마의 상황을 설명을 하고, 딸로서, 여성으로서, 동지로써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상담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책 같은 것이 있으면 추천을 좀 해 달라고. 그러자 답장이 왔다. [아주 특별한 용기]라는 책을 추천해 주시며 행복과 행운을 빌어 주셨다.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엄마에게 선물할 책을 사고 또 예쁜 포장지도 샀다. 평소 포장지 같은 것에 돈 쓰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곤 했지만, 엄마에게 선물할 그 책은 "아주 특별하게" 한껏 예쁘게 꾸며서 선물하고 싶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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