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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May 09. 2018

13.성폭력 가해자에게 보내는 편지

: 친오빠라는 인연이었던 너에게

내가 며칠 전 너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 브런치 주소를 링크했으니, 네가 이 글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시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뭐.. 언제나 그랬듯이 난 내 자리에서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 할 뿐이니까. 


연초에 안태근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손석희 씨의 인터뷰를 보고, 마음이 참 힘들어져서 너에게 쪽지 한 장을 우편으로 보냈었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쪽지 한 장.  


"요즘 미투 운동으로 인해 내 마음이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런 한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너의 답장을 기다렸는데 아무 답이 없더라. 나를 무시한 걸까 아니면 나를 두려워한 것일까? 잘 모르겠어. 사실 난 너에게 새롭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생겨서 연락을 취한 것인데, 네가 아무 답변이 없으니 은근히 화가 나더라. 


'뭐야. 이미 지나간 일이라 이거야? 네가 이미 나에게 사과했으니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청산할 것이 없다 이거야?'


사실 너에게 연락을 몇 년 만에 다시 취하면서, 내 마음은 두 갈래였여. 하나는 나의 새로운 요구사항을 전달해야겠다, 두 번째는... 너를 한번 더 괴롭히고 싶다... 


'나와 나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너로 인해 아팠으니, 너와 너의 주변 사람들도 한번 아파봐라... 예전에 한 복수는 성에 차지 않아. 내가 너무 쉽게 봐준 거 같아. 다시 한번 더 괴롭히고 싶어...'


그런데 우스운 게 뭔 줄 알아? 그렇게 한번 더 너를 괴롭히고 싶다... 는 마음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게 너무 귀찮은 거야. 뭔가 괴롭히려면 머리를 써야 하고 이 일에 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것조차 또 귀찮은 거지. 난 이미 저 앞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런 나 자신을 다시금 복수를 해야 한다는 과거의 시점에 끌어다 놓는 것이 사실 피곤한 일이지.


그래도 네가 내 첫 번째 그 쪽지를 무시한 것에 기분이 상했기에, 그리고 일단 시작을 했으면 마무리는 지어야 했기에 다시 네게 이메일을 보냈지. 연락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또 답을 안 하면 직접 찾아가려고 했었어.


며칠 뒤 네가 답을 했더라. 내게 존댓말을 쓰며, 지금껏 과거에 공증했던 내용을 잘 따르고 있다고, 나에게 많이 미안하고 죄송하고 송구하다고. 그렇게 바짝 엎드린 너의 이메일을 보고 내가 약간의 쾌감을 느꼈다면... 넌 나를 잔인하고 유치하다고 비난할 건가? 글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건 사실이야. 내가 아직은 그런 유치한 인간이라서 네가 나에게 그렇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은 마음이 통쾌하라. 그래, 그랬어. 그렇지만 난 알아. 넌 여전히 나와의 관계에서 죗값을 다 치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아니, 평생을 다 해도 다 치를 수는 없는 것이겠지. 네가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을 더, 어떤 이유로 나와 연락을 취하게 될지 혹은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넌 앞으로도 내게 계속 고개 숙이길 바라. 나를 위해서도, 결국 너 자신을 위해서도.


십몇 년 전에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사과를 요구할 때, 그 당시 작성했던 노트를 얼마 전에 찾았어. 부모님 댁 옷장의 저 깊숙한 곳에, 밀봉된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니, 옛 기억이 필요했거든. 이젠 가물가물 해진 기억이라서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 글을 가끔씩 찾아와서 읽어 주시고 구독까지 해 주시는 분들은 아마도, 내 추측컨데,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 직접적인 성폭력이라는 경험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감정의 흔적을 갖고 있으신 분들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최대한 왜곡 없이 전달하고 싶어서.


그 오래된 노트를 열어 보니,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나의 분노를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어.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분노의 쓰나미가 득실득실하더라. 깜짝 놀랐어. 내가 이랬구나.. 내 분노가 이 정도였구나. 그 이야기를 앞으로는 이 곳 브런치에 조금씩 더 풀어내 볼 거야. 그런데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가 왜 그 분노, 증오를 다 뒤로 한채 너에게 최소한의 것들만을 요구하고는 너를 풀어주었는지... 그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처음엔 너를 어떻게 괴롭해 줄까.. 너에게 어떻게 하면 더 큰 두려움을 줄 수 있을까.. 를 고민했지. 왜냐면 그래야만 내 분노가 사그라지고 내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다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내가 겪은 아픔, 고통, 절망, 두려움, 공포를 네가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너도 똑같이 누군가에게 성폭력을 당해야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겪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 그리고는 곧,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때서야, '아, 이것은 내 것일 수밖에 없구나. 너에게, 혹은 타인에게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나누려야 나눌 수 없는 온전한 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어. 다른 모든 경험들, 감정들처럼 말이야. 사실 모든 경험들과 그에 따른 감정들은 주관적이지. 1 인용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이런 생각은 절망감이나 좌절감이 아니었어. 이 생각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었고 난 그때부터 너를 괴롭히는 것을 통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오히려 살짝은 가벼운 마음이 들더라.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으니, 해결법이 오히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느낌? 그전에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어떡하면 내 마음이 풀리지?'라고 분노와 증오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 말이야. 


그랬던 거야. 그래서 너를 그만 괴롭히고 놓아준 거야. 난 너에게 가해자 상담을 받게 했고, 더불어 심리 상담도 받게 했고,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에 매달, 소액이지만 기부를 하게 했지. 가해자 상담을 받게 한 것은 너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심리상담은 너 역시 어릴 적 겪은 상처에 의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쉼터에 기부를 하라고 한 것은, 두고 두고 후회하고 반성하라는 의미였고.


아무튼 이번에 내가 너에게 새롭게 요구한 것은, 쉼터에 기부하는 액수를 좀 인상하라는 것. 난 액수를 정하지도 않았고 네가 그렇게 내 요구를 따를지 말지도 확인하지 않을 거야. 그냥 그러리라 믿는다. 


네가 최근 건강 문제가 생겨서 두 번이나 수술을 했다고? 그래.. 뭔지는 몰라도 스트레스가 원인 중에 하나일 거야. 잘 살아라. 너도 네 인생에서 과거에 일어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성격을 명확히 들여다 보고 네 문제를 네 안에서부터 해결해 나가갈 바란다. 남 탓 그만하고 성숙한 어른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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