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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Jul 01. 2018

14.성폭력 가해자,네 정체성은 피해자인 내가 결정한다

: 그분? Or 그놈?

*일이 있어서 현재 사는 곳을 떠나 한 두 달간 머물렀습니다. 일상에서 멀어지니 차분하게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쉽지가 않았네요. 어차피 마음잡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못할 것 같아서 과감하게.. 아무 글도 쓰지 않았어요. 혹시 제 글을 기다리신 분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TV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설명하며 가해자를 지칭할 때 주로 가해자의 직책을 부르는 것을 자주 접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과장님', '교수님', 혹은 '감독님'... 그때마다 의구심이 들었다. '왜? 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그 가해자에게 존칭을 써서 부르지? 청자에게 누구라는 것을 헷갈리지 않게 전달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굳이 '님'자는 붙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분' 대신에 '그놈', '그 새끼' 등,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현재의 관계에 비추어 가해자를 지칭하기 더욱 정확한 호칭이 있을 텐데. 욕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까? 욕의 순기능을 인정할 수 없는 대중매체의 특성 때문이라면, 그리고 개인적으로 욕을 매우 싫어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아주 아주 오래된 나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가해자와 주고받았던 이메일을 열어 보니, 나 역시... 나와 나의 가해자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하기까지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내가 성폭력 가해자인 친오빠에게 이메일을 통해 나의 피해 사실에 대해 언급을 하고 사과를 요구한 것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정확히 보자면 그때의 나는 '성폭력 피해자'로써 '성폭력 가해자'인 그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은 아니다. 당시 가족 간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난 '여동생'의 정체성으로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 가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내가 입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한 것 같다. 그다지 길게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나...


"니 놈 때문에 내 유년시절이 망가졌다, 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다..."


그런 말들을 쏟아낸 것 같다. 그 메일을 쓰면서 펑펑 울었었다. 그러면서 카타르시스와 같은 감정도 동시에 느꼈다. 내 입으로 처음으로, 가해자에게, 그것도 옆집 아저씨가 아닌 친오빠라는 더욱 부담스러운 관계에 있는 가해자에게, "난 피해자다. 넌 나에게 나쁜 짓을 했다"라고 소리친 것이니까. 그때의 난 20대 초반이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때 그 녀석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면, 30대 중반인 지금의 내가 보기에, 난 가족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다소 여리고 애처로운 '여학생' 혹은 '여동생' 혹은 '딸'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는 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 당사자인 그 녀석에게 '네가 나한테 이런 짓을 했잖아.'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그 순간은 분명히 매우 격앙되어 있었고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 큰 용기가 필요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분명 그 짧은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몇 번은 반복했겠지. 


그 녀석은 내게 답장을 보냈다. 당시 그의 답장 속에서 그의 정체성은 '오빠'였고 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 정체성이란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 속에 형성되고 결정되는 것이니까. 내가 나를 '여동생'으로 규정했으니 그는 '오빠'노릇을 한 것이겠지.


당시 20대 중반인 그가 내게 보낸 답장에는 허세가 가득했다. 물론 지금의 눈으로 보면 말이다. 당시에는 나 역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에 짓눌려 있어 그 허세가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녀석은 자신이 매우 똑똑한 사람이라는,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합리적이고... 심지어 '세계시민주의적 개인주의'라는 표현을 쓰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당시에 그 녀석에 내게 보낸 이메일을 노트북 한편에 열어두고 보고 있는데.. 손발이 오글오글 거리는 군...;;;


그의 자신의 성폭력에 대한 첫 번째 사과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선 너에게 있어서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것은 네가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안으로 참고 있었던 너에게 좋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에 나도 묻어두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진다.


"뻔뻔스러워서 말을 안 하고, 생각이 없어서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일곱 문장.


흠.. 십몇 년 만에 저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니.. 전 경기도지사 안희정의 말투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괘념치 말거라."


처음에 안희정이 피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듣고는, 무슨 사극에서 상감마마가 궁녀에게 하는 말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의 성폭력 가해자도 거의 유사한 말투와 자세를 지니고 있었군.  정도는 괜찮다는 가해자들의 유사한 착각인가? 자신이 시혜를 베풀면 그 정도의 잘못된 행위는 상쇄된다고 생각하는 것... 인가? 


또한 플레인 (Mansplain)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다. 오히려 나를 위해 입 다물고 있었다... 자신은 뻔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자신의 배려? 혹은 성의?를 피해자인 내가 알기 바란다...


참 같잖다..ㅎㅎㅎ


이것이 그 녀석이 내게 한 첫 사과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격분하게 만든 촉매제이기도 하고.

 

만약 그 녀석이 처음부터 공손하게 사과했다면,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면 어땠을까? 나의 울분이 조금은 가라앉았을까? 나는 내가 밟은 길이 아닌, 조금은 다른 방식을 통해 나의 사건을 마주하고 다루게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녀석은 자신의 사과가 나의 분노에, 분노보다도 더 뜨겁고 격렬한 그 무언가에, 석유를 사정없이 끼얹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일곱 문장을 뒤로 하고는 자신의 세계관과 신념 등등.. 자신이 가족문제에 있어서 취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생각들을 700자에 걸쳐 이야기한다.


7 문장과 700자...


물론 그 녀석 역시 집안 문에 있어서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그 녀석 역시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 (vicious circle)에서 한 축이었으니. 하지만 그 가족 안에서 최약자였던 나는, 그러한 내 눈에는 그 녀석의 정당화가 참..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참 유치하고 같잖게 느껴진다.


아무튼,

그 녀석의 그 이메일이 나를 거의 이성을 상실하다시피 분노하게 만들었고,

난 엄청나게 화를 내며 다시 이메일을 보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게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로 끝날 문제냐고. 엄청 욕을 퍼부었었다. 아마 만화 드래곤볼에서 상대방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장비인 스카우터가 내 주변에 있었다면, 당시 나의 에너지와 전투력은 그 스카우터를 폭발시키고 터트려 버리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나의 이성의 끈을 "뚝!"하고 끊어지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게 욕을 퍼부으며 이메일 작성을 마치고 그 메일을 보내려 하자, 그놈이 내 아이디를 수신거부로 설정해 놓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가장, 정말 가장 많이 화가 났던 것 같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에서 현을 팽팽하게 조절하다가, 이미 현이 충분히 당겨졌는데도 계속 나사를 조이면 결국 "뚝!"하고 현이 끊어지며 튕겨져 나가듯이.. 내 머릿속의 이성의 끈이 그때 그렇게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부모님과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상황이고 나 역시 부모님께 나의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황이기에... 나로서는 그 상황에서 그 녀석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여차 저차 해서 내가 그 녀석에게 다시 보낸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과 나의 관계 정립부터 합시다. 오빠와 동생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신과 난 가해자와 피해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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