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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Feb 26. 2018

5.성폭력 in 가족,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법

내가 알고 있는 성폭력 사례들은, 나의 사례를 포함해서, 가족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이 굉장히 많다. (사촌) 오빠가 여동생에게, 아빠가 딸에게. 삼촌이 (여/남) 조카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 니체처럼, 누나가 남동생에게.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어떤 특성이 있을까. 누군가는 어릴 적에 친족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 가장 신뢰하는, 가까운 관계에서 신뢰가 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본 적은 없다. 여전히 난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기며 (솔직히 혼자 떠나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즐긴다. 그들이 도움을 줄 때도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그게 여행이니까:)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난 사람을 일단 신뢰하고서는, 모든 관계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왔지만, 그래도 타인에 대해서 우선은 내가 먼저 신뢰를 하는 것이, 그것이 깨지기 전까지는 아낌없이 신뢰를 하는 것이, 이... 각박하다고 묘사되는 요즘 세상에서 조금은 더 재미나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된다는 말은, 인생에서 심각한 배신을 경험해 본 사람이, 타인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는 말로 우회하여 이해하고 싶다. 


내가 발견한 가족 안에서의 성폭력의 특징은 피해자가 자기보다 다른 누군가, 다른 무언가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또 다른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촌이 여성 혹은 남성 조카에게 성폭력을 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일을 발설하면, 네 동생한테도 똑같이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어린 조카는, 약자이기에 자신의 선택지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잔인하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참아내며 속으로 곪아간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피해자는 유사한 방식으로 자기보다 더 약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안정을 깨지 않기 위해, 마치 엄마 뱃속에서부터 익혀온 듯 본능처럼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참는다. 그렇다면 과연 그 희생의 대가로, 그녀/그의 동생은 삼촌의 성폭력에서 안전한가? 아닐 것이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족 안의 성폭력에서 가장 잔인한 점인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잔인함 속에서도 한 가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고 싶다.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나보다 약한 동생 혹은 가족 전체를 위해 나의 고통을 참는 것... 현명한 선택인지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선택인지를 떠나서, 우선은 그 피해자는 최소한, 자신보다 약자, 혹은 다수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어린 나이의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린 나이에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최선일 테니까).


나 역시 나의 가해자, 오빠에 의한 성폭력 피해 중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나의 토끼 인형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갖고 놀던 조금은 낡은 하얀 토끼. 코는 연분홍색이고 귀와 손과 발이 연보라색이었던, 어렸던 내 품 안에 가득 차게 들어왔던 흰 토끼 인형. 어느 날 그 토끼에 내 가해자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심정은. 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참혹? 그 정도면 적절할까? 부족할까? 아무튼... 10살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심지어 묘사하기에도 힘겨운 감정.


'내가 너를 지키지 못했구나. 미안해. 미안해. 너를 지켰어야 하는데. 너까지.'


그 토끼를 끌어안고 난 주저앉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하지만 펑펑. 참으로 서럽게. 울었었다.




상담 선생님이 가족 안에서의 성폭력 및 학대 문제가 다른 어떤 조직에서의 문제보다 복잡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이유는, 가족 안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서로 물리고 물리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대한 태도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 할아버지는 또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아버지는 또 그의... 또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달릴 때 그 어린 아들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가족 내 또 다른 성인인 어머니는, 폭력에 대한 묵인이나 최소한 무능력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포지션에 위치해 있는 딸은, 아들과의 비교 대상으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아들에게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이때 아들이 그 여동생을 괴롭힌다면, 그 여동생이 당하는 폭력의 근본적 원인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냥 그 아들만 탓하면 될까? 그것은 마치 잔인한 범죄자 한명만 사형시키면, 그 사회가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순진하고픈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을 괴롭힌 아버지의 탓인가? 아니면 어린 아들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를 괴롭힌 할아버지? 아니면 그의 할아버지... 결국은 단군 할아버지?


딸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한 아들을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건강하게 상황을 풀어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탓하고자 함도 더더욱 아니다. 그들도 그들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부모'역할 일 것이고,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것이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의 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겠지. 우리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는 다만, 가족 내의 폭력의 악순환을 짚어 보고자 함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서서 어미의 젖을 찾는 노루 새끼보다, 본질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이고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런 인간들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탄생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안에서 악순환되는 폭력은 항상 가족 내에서 최약자를 찾아내어 향한다. 우리 집의 경우는 나였겠지. 나이도 가장 어리고, 여성이고. 난 말수도 적고 심지어 얌전하기까지 했다. 성인이 된 이후의 나를 만난 사람들은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릴 적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어르신들에게는 항상 '의젓하다', '6남매의 맏이 같다', 혹은 '맏며느리감이다'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진... 짜다;; 그 유해한 칭찬들 속에서 자란 어린 나는 내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 내가 편했겠지. 폭력의 대상으로는 안전해 보였겠지.


가족 안에서 폭력이 대물림되는 것에 대한 나의 이해가 옳다면, 나 역시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찾아내어 괴롭히는 것이 순리(?) 일 것이다. 어릴 적에는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이후에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찾아내어 괴롭히는 것으로 나의 트라우마에 의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희생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머무는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이미 연세가 들어버린 부모님이 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애완동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이 폭력의 악순환은 또 다른 얼굴을 한 채 계속 이어져 어디론가 더 약한 누군가를 향해 계속 대물림되어 내려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가해자로써 살아갈지도. 또 다른 경우는, 내가 나보다 약한 누군가, 무언가를 찾지 않고/못하고 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영화 '용서'의 남지현이 분하는 지민처럼. 학대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 결국 스스로를 학대해 버리는. 그랬다면 나는, 한국인이 고통받는 병으로써 미 정신의학계가 한국어 'Haw byung'으로 등록했다는, 그 화병에 걸리거나, 수백 년 전 조선시대 여성들과 다를 바 없이 한을 품고 살아가다가 녹슨 칼 하나 입에 물고 애먼 사람들 꿈에나 나타나는 귀신이 되었을지도...


하지만 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냈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찾지도 않았고 나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를 괴롭혔던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좀 시간 차는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과를 요구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어디서부터 인가 대물림되어 내려오던 그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냈다. 25살의 내가. 토닥토닥...


결국 그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은,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해야 하는 그 인간적인 상식을 지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상식을 지키는 것이다. 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을 품는 그 최소한의 인간성, 나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에게, 두렵더라도 최소한, 내 분노의 방향을 정조준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내는 것이, 그 질긴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건투를 빈다, 우리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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