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차피 궁극적인 목적은 좀 더 즐거운, 행복한 삶이니까
(15편에 이어서...)
“제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게 될 때쯤, 몸에서 '냉'이 나왔습니다.
생리가 시작되기 전의 여자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전 제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혼자서 집에 있는 가정의학백과사전을 엄마 몰래 찾아보며 성병에 걸린 줄 알았고..
밤새워 울며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성폭력 상담소에 보냈던 내 이메일의 한 부분이다. 이걸 읽으니 어스름하게 기억이 난다. 붉은색 커버, 누런색의 낡은 책장들, 여러 가지 질병들의 증상 및 치료법들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여 있었지. 가정의학백과사전. 고작 10살의 나는 그 책에서 여성질환 혹은 부인과 질환.. 뭐 이런 목차 아래에서 내 증상들을 찾아봤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그 낯선 이름들의 성병 증상들과 내 증상들을 비교해봤었다. 아무도 집에 없을 때, 10살인 나는.... 혼자 들고 옮기기조차 버거운 그 크고 무거운 책을 읽어보며… 겁을 잔뜩 집어 먹었었지...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구나.
그리고는 깜깜한 밤에 혼자서 울었었지. 죽을까 봐. 죽음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그냥 거대한 어둠과 같은 두려움에 혼자 짓눌려. 그렇게 흐느꼈었지. 전지적인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서는 그렇게 울며 기도 했었지. 나를 그렇게 힘들게 만든 그 녀석은 내 옆방에서 오빠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미 다 잊혀졌지만...오래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10살의 내가, 그렇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가해자 녀석에게.. 최대한 자세히,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녀석이 내 이메일을 수신 거부하여 연락이 끊어진 그 기간 동안, 나는 한국성폭력 상담소에 상담 이메일을 보내는 동시에 부모님께 나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는 과정을 겪어 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그 녀석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내게 되어 내가 다시 먼저 문자를 보냈다.
짧게 보낸 것 같다. '기회를 줬는데.. 감히 그 기회를 거부해? 고소하겠다…' 뭐 이런 내용으로 보낸 것 같은데. 득달같이 전화가 오더라. 너무 놀라서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 몇 번을 그렇게 연달아서, 쉬지 않고, 계속 전화가 오더라. 고소..라는 게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전화가 조금 잠잠해졌을 때 문자를 보냈다. 전화받고 싶지 않다고. 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하라고.
그 녀석이 문자로 말하기, 자기가 나를 수신 거부한 일이 없다며, 갑자기 연락이 안 되었던 거라고 했다.
…글쎄. 신뢰하진 않지만 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이미 지난 일이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서 나한테 빌고 또 빌더라. 잘못했다고. 그 녀석의 문자가… 당시 나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폴더 폰을 쓰고 있었는데.. 그 폰의 진동이 힘겨울 정도로 문자가 미친 듯이 왔다. 그 녀석의 다급한 상황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내 폰은 쉴 새 없이 진동음을 내며 흔들렸고 내 심장박동도 그에 맞춰 미친 듯이 뛰었던 것 같다. 그 녀석의 문자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나는 그 문자를 다 확인하고는 싹 다... 삭제해 버렸다.
응?
나... 뭘 한 거지?
그걸 삭제하면 어떡하지? 가해자가 취한 행동들을 기록, 보관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걸 모르는 바 아닌데.. 나 방금 뭘 한 거지?
속된 표현으로 꼭지가 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그때 내가 그랬나 보다. 꼭지가 돌아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나 보다. 그 녀석의 문자를 삭제해 버리는 내 손가락에는, 내 이성의 힘은 1도 미치지 못했다. 내 손가락은 그저 내 심장박동에 맞춰서 정신없이 삭제 버튼을 연거푸 누르고 있었다.
정신을 좀 차린 후, 그 녀석에서 이메일로 이야기하자고 했고 그 녀석은 내게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 메일로 인해 내가 문자를 지운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튼..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전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다니니...
그 녀석은 이메일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겠다, 때리면 맞겠다, 정말 잘못했다. 어릴 때 정말 생각 없이 죄를 저질렀다… 오빠로서 잘해주지 못한 게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철없을 때 저지른 큰 잘못을 사죄 하는 것조차 아직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다니.. 그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일찍부터 사죄했겠지만..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원망과 증오를 가질 줄 몰랐다. 너무 놀랐고, 너무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이 몇 번이나 쓰여 있었을까.. 미안하다란 말은 또 몇 번이었을까.
그 이메일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몰랐다...? 그럼 이젠 알게 되었다는 것인가.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상담소에서 내게 해 준 구체적인 조언에는,
가해자를 처음 대면할 때 어떻게 경계심을 갖지 않게 하는지, 어떻게 녹취를 해야 하는지, 합의를 이행시키려는 공증은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식으로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자신의 발언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사과 또한 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리고 태도가 돌변하여 오히려 정신이상 운운하며 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등의 조언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가해자의 1차적 사과 속에, 진심인지, 어느 정도로 자책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무척 많이 놀랐고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고 하는.. 그런 잔머리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의 그 다급한 이메일에 대한 답장으로,
"성폭력과 성추행 등에 대한 법적/사회적 정의에 대해서 공부해라. 그리고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해서도 공부해라. 내가 또다시 조금이라도 너의 행동 및 발언으로 상처를 입거나 불쾌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행동을 축소하려 하거나 남 탓을 하려고 하지 말아라. 만약 그런 시도를 한다면,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파괴해 버릴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절대로.
실수를.
허용하지 않겠다."
답장을 이렇게 시작한 것은, 마지막까지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다시는 가치 없는 존재로 인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상처를 입거나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 10살의 친족 성폭력 피해자였던 어린 나를, 조금 늦었지만, 지켜내고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나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것이었다. '널 상처낼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좋다...' 이런 소모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그랬을지라도, 꾸준한 상담과 공부, 그리고 사색을 통해서 나만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복수심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보호가 내겐 더 중요했다. 어차피 더 행복해지자고, 더 즐거운 삶을 살아보자고 벌인 일이니까:)
"내 행동을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십수 년을 피눈물 흘리며 준비해왔고 기다려왔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십수 년 동안을 난 수백 년처럼 느끼며 그 긴 시간 동안 당신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였다."
"다음 얘기는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가 이메일로 연락하겠다."
이렇게.. 마치 와신상담의 끝에 복수극의 서막이 열리는 것처럼… 적어도 그 녀석은 그렇게 느끼게끔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나에게 있어서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 성폭력 사건을 매듭지는, 끝맺음하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끝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 그 당시 한국성폭력 상담소에 보낸 내 상담 내용 중 일부:
"(공증받는 문제는) 일단 주변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서 일을 진행할 것입니다.
그 가해자는 소심하고 겁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무척 위축되어 있습니다.
공증을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계획을 다 세운 후 다시 이 이메일로 상담을 부탁하겠습니다.
지금 긴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답장:
"'지금 긴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이야기에,
마침내 반응을 보이고, 성급하나마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려 하는 가해자를
맞닥뜨린 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어딘가 정말 시원하시기도 할 것 같아요.
00님의 느낌과 행동을 지지합니다.
님은 용기 있는 생존자의 모습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님의 멋진 계획,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