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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Aug 01. 2018

17.성폭력 피해자의 눈으로 안희정 사건 바라보기

(16편에 이어서...)


내가 성폭력 가해자에게 다시 보내기 시작한 편지...


"뭉뚱그려진 사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나 사실을 인정하였으니 일단은 넘어가고, 다음에 계속 거론할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그 사실로 많이 아파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릴 적 내가 울면서 당신에게 제발 하지 말라고, 지옥에 갈 거라고 울면서 사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압니까? 그리고 그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나요? 그때 당신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러고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은 내가 잘 때만 골라서 나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난 눈을 질끈감고 자는 척을 했지만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내가 그 녀석에게 보낸 이메일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그 녀석이 나를 언제 어떻게 괴롭혔는지, 나는 어떤 공포와 슬픔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렇게 빠진 것 없이 상세하게 다 기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참 대견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다 토해냈었다. 이곳 브런치에 적었던 몇몇 사례들도 포함해서, 나의 토끼 인형 이야기, 사춘기 때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지 등... 그리고 좀 더 적나라한 상황 묘사들. 방 안에서, 주말 나들이에서, 방학 때 외갓집에서...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내 몸의 어디를 어떻게 유린했었는지. 있었던 일 그대로 가감 없이,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지 않고 다 묘사했다. 단 하나라도 토해내지 않고 내 안에 남기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상세하게, 거북하리만큼 적나라한 표현들을 피하지 않고 다 쏟아내어 전달하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긴장, 공포, 두려움까지.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녀석의 성폭력에 노출이 되어 있을 그 당시에 그 녀석에게 증오나 원망과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증오나 분노는 그 상황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객관화 할 수 있을 때 올라오는 감정들이지, 폭력에 바로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는 공포에 사로잡혀 분노할 틈조차 없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상황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내가 성폭력 피해자라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 무거워서 나 스스로 그 사실을 억누르고 외면하고 부정하니까. 아무일 아닌 척하고,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인 것 처럼 모르는 척하고 넘기고 싶으니까.


누군가가 총구를 내 머리에 들이밀고 내 생명 줄을 쥐고 있다고 상상을 하면, 그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할 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단 그 상황에서 한걸음 빠져나와 몸과 마음을 좀 추스르고 나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상황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면서 분노라는 것도, 증오라는것도 품게 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의 객관화를 끝냈다 해 을 압박하고 폭력을 가했던 그 가해자에게 즉각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를 마음 놓고 위협할 정도로, 눈치 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강한 상대인데, 믿는 구석이 있는 상대인데... 내 분노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아무렇게나 마구 표출하면, 결과적으로 난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될 것이 뻔한데.


정신을 가다듬고, 가해자에 대해 한가닥이라도 남아 있던 신뢰를 걷어 내고, 마음을 다 잡으며 각오를 세우고, 나를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나 스스로 더 강해지기까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화를 내며 따져 묻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아닐까?


자꾸만 작아지려는, 뒷걸음 치려는 스스로를 일으켜 새우며 용기를 북돋는 과정이 너무나도 지난하고 힘겨운 이유는... 우리는 로봇이 아닌 인간이니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애초에 주어진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피해자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약자니까.


그 모든 과정이 나의 경우에는 10년이 넘게 걸린 것이고...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몇 년이 걸리기도하고 몇 주가 걸리기도 하고... 그런 것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요즘 나의 사건과 안희정성폭력 사건이 자꾸만 오버랩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게, “이 여학생은 또래보다 성숙했고, 장애인도 아니고, 공부도 잘 했고, 반장도 여러 번 할 정도로 똑똑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신임도 받았고, 주체적으로 생활하는 학생으로서 부모님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학생이었다. 이런 우수한 학생이 2년 가까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성적으로 착취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 여성은 가해자와 몇 개월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 가해자가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복학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같이 지낸 적이 있다). 이 여성은 그 당시에 힘든 내색을 한 적도 없고 불편함을 호소한 적이 없으며 평범하게 남매로서 생활했다. 이 여성이 가해자를 좋아하고 그 관계를 즐긴 것이 아니라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10년 넘게 지난 지금 이러는 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것이 의심된다” 라고 말한다면…?


이는 안희정의 변호인단이 피해자를 의심하면서 한 말들을 조금씩 내 상황에 맞게 고친 것이다. 만약 나의 가해자가 안희정처럼 대단한(?) 사람이고 내가 나의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물론 동일한 상황도, 동일한 관계도 아니지만 나는 안희정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피해자의 최후진술서를 보면서... 특히 피해자가  스스로의 모습을 ‘목석’이라고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사건과 자꾸만 겹쳐진다.


 


어느 방향에서, 언제, 어떻게, 몇 번이나 더 날아올지 모르는 돌을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고 해서, 그 돌을 맞은 사람한테 왜 계속 돌을 맞았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을 던져 미안하다고, 그렇게 아픈 줄 몰랐다고, 실수였다고, 이제는 던지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며 자신에 대한 피해자의 신뢰를 악용한 다음, 가해자는 그 약속을 깨고 또다시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을 피하지 못하고 또다시 피를 흘리게 된 피해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는 돌에 맞아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가해자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깨어진 것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자기보다 더 약한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가해자가 던지는 돌에 맞게 될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나 가해자에게 돌 맞았다고,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맞았다고 이제 겨우 비명을 질렀는데...


어떤 사람들은 왜 여러 번 맞았냐고, 그때까지 뭐했냐고, 왜 맞자마자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가지 않았냐고 비난을 한다. 심지어 너도 맞는 것을 즐긴 것 아니냐며 의심을 한다.


만약, 피해자가 딱 한번 돌을 맞고,혹은 맞을 뻔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비명을 질렀다면… 유난떤다고, 너무 예민하다고, 그래서 사회생활 하겠냐고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까. 또한, 내가 가장 역겨워하는 표현인, ‘앞길이 창창한 능력 있는 남자의 발목을 잡는다’고 욕이나 들으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지나 않았을까.


물론 어떤 사람은 딱 한번 돌멩이를 맞은 상황에서, 자신의 꿈, 미래, 인생을 다 던져버릴 결심을 하고는, 비명을 지르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용감하다고, 대단하다고 칭찬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혹은 그만큼 용감하고 민첩하고 혹은 똑똑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 못하고 몇 번을 더 맞았다고 해서, 그것이 비난받을 일인가.


가해자는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 피해자의 인간적인 연민을 자극하고 자신에 대한 기존의 신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 후, 다시는 던지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또 연거푸 돌을 던졌다.


피해자에게 왜 용감하지 못했냐, 왜 더 민첩하지 못했냐, 혹은 왜 칠칠치 못하게 돌을 계속 맞았냐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왜 돌을 던졌냐고, 왜 스스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또 던졌냐고 따져 묻는 것이 이 사건에 대한 질문의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난 용감하지 못하고 민첩하지 못하고 혹은 똑똑하지도 못한 평범한 사람이서, 2년에 가깝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운이 좋은 점이 있면, 내 가해자는 안희정만큼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다.

 

To be continued...


P.S.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뺨을 맞은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낼 수 있고 따질 수도 있지만, 칼이나 총에 의해 중상을 입은 피해자는...어떨까? 과연 그 자리에서 당장 화를 낼 수 있을까...

만약, 안희정 사건을 보고, "때리거나 칼로 찌른건 아니잖아!"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냥 가볍게 '개무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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