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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Aug 06. 2018

18.성폭력가해자에게, 나는 작은 악마였다.

: 악마 is 뭔들,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17편에 이어서...)


내가 나의 가해자에게 그렇게...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라며 마치 90년대의 촌스러운 무협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포를 놓고 나서,

솔직히 카타르시스를 느꼈었다.


꾸미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백하자면, 그 당시에는, 마치 생쥐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과 가해자에 대한 오랜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이 상황 전체에 대한 힘겨움이 감소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렸던 나를 성적으로 괴롭힌 가해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라는 존재였던 그 사람이 내 한마디 한마디에 벌벌 떠는 것을 느끼면서 잔인한 희열을 느꼈었다. 도망갈 구멍이 없는 구석으로 생쥐를 몰아넣으며, 그 생쥐를 천천히 내려다보며, 앞발로 툭툭 치며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잔인한가?


비열한가?


도덕적이지 못한가?


아니면 얌전하지 못한가?


피해자답지 못한가?

 


누군가가 그렇게 따져 묻는다면, 난 그저 “응, 난 그래.”라고 대답할 것 같다:)



가해자에게, 비록 이메일을 통한 것이었지만,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분출하였다. 실제로도 가해자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약 두 달간, 내 안의 악한 혹은 독한 본성이 튀어나왔고 난 그것들을 억누르지 않고 공격적으로 드러내었다. 의도적으로 그 녀석이 더 당황하게끔, 더 겁먹게끔 미끼를 던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 녀석의 거듭되는 사과 끝에, 내가 아무 설명하지 않고 불쑥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다던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경황없는 와중에 그 녀석은 더 당황했고 그 녀석의 방어기제가 불쑥 튀어나왔다.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보호해 보고자,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여성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하며. 그렇게 그 녀석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따져 물으려 하면, 난 그것을 빌미로 더욱 매몰차게 그 녀석을 다시 궁지에 몰아넣었다.


...


그렇게 그 녀석을 의도적으로 괴롭혔다. 흔히 말하는 ‘바지에 오줌 쌀만큼 무섭다.’라는 말처럼, 그 정도까지 그 녀석을 벼랑 끝까지 몰고 싶었으니까.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한 것은 이메일을 보낸 것뿐이다.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그 녀석이 내게 가했던 폭력들, 그로 인해 내가 겪은 괴로움과 고통들을 하나하나 다 빠뜨리지 않고 최대한 상세히... 눈덩이를 뭉치듯 꽁꽁 뭉쳐서 그 녀석에서 쉴 새 없이 던졌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무슨 큰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그 녀석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어마 무시한 계획을 하고 있는 것처럼 겁을 주었다.





“11살의 내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하지 말라고 울면서 사정했을 때, 당신은 멈췄어야 했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당신에게 이메일로 따져 물었을 때, 그때라도 당신은 나에게 잘못을 빌었어야 했습니다. 그때라도 지금 나에게 하는 것처럼 잘못을 빌고 부모님께도 잘못을 빌었어야 했습니다.
당신의 사과가 받아들여지든 말든 당신은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처음에 난 내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 줄도 모른 채 그냥 본능적으로 무섭고 큰 일이라고만 느꼈었고 부모님께 들키면 큰일이 날 줄 알았습니다. 나의 그런 생각이 당신의 그 폭력을 지속시켰겠지요.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요. ‘내 동생은 내성적이고 얌전한 애니까 절대로 부모님께 이르지 못할 거야...’ 그래서 계속 폭력을 멈추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생각했기에 안심하고 그 긴 시간 동안 날 괴롭힐 수 있었겠지요.”


“당신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잘못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 부모님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당신이 사랑한다는 그 여성이 나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으로 인해 피눈물을 흘렸는데 말이죠.”


당신은 지금 나의 분노와 증오가 두렵고 무섭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무엇이 무섭습니까? 겁나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이 무서웠습니다. 정말 많이. 내가 당신과 둘이 있는 순간을 얼마나 두려워했던지 당신은 절대 모르겠지요. 지금 당신은 내게 고소당하는 것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그 말이 무섭습니까?”


“당신은 내가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 내가 참 원망스럽겠죠. 왜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이러는지.. 이런 얘기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압니까?"


“짐승들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마음껏 괴롭히고 유린합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해 보이고 공격적인 대상에게는 꼬리를 내리며 눈치를 봅니다. 당신의 모습과 무엇이 다릅니까. 갑자기 이제 와서 잘못을 다 인정하고 사과하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내게 고소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 나에게 잘못을 비는 것도 내겐 당신이 고소라는 내 무기를 피하려 하는 비겁함으로 보이는군요. 변명과 거짓, 비겁함 뿐인 당신의 인생이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내 아픔을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불안, 초초, 두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지난 시간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은 당신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판단할 수 있겠지요. 설마 한마디 사과로, 몇 줄의 사과 이메일로 당신의 죗값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미안하다, 송구하다.. 를 반복하며 사과를 하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방어해 보려는 몇 번의 시도를 통해서 그 녀석도 학습하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이 방어기제를 발휘해 봤자, 더 이상 무서울 것도, 꺼릴 것도, 감출 것도 없는 나라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더 화만 돋울 뿐이라는 것을.


내 마음속에는 마지막 단계로 그 녀석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 녀석이 그렇게 정신없이, 허겁지겁하는 사과를 받아들이고는 “자, 네가 사과를 했으니… 이러이러한 것들이 내가 너한테 요구할 것이야. 이것들을 이행하면 모든 절차가 다 끝날 것이야.”라고 순순히 출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순순히 해소될 수 있는 마음의 응어리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고, 문제가 있을 때 완벽주의자처럼 꼼꼼하게 따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난 그 당시, 창 모양의 꼬리가 달리, 빠알간 악마와 같았으니까...

(이왕이면 작고 귀여운 악마를 떠올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 녀석의 이메일...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생각만 하면 앞이 아득하고 당신이 겪었을 고통과 나에 대한 증오를 생각하면서 지금 나는 냉정하지가 못하고 솔직히 말해서 당황하고 겁이 납니다. ...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장 큰 가운데에서도 나도 겁이 납니다. 나도 말로 잘못을 빌 사안이 아닌 것 압니다. ... 정말 내 솔직한 생각은 미안하고 두려운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 내가 어떻게 해 준다고 해도 당신이 쉽게 치유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을 미안해하고 무엇으로 인해 괴롭고 무엇으로 인해 죄송한지는 상기하지 않아도 언제나 뚜렷이 생각나지만 막연히 모든 것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오지, 어느 것이 두려운지 분석할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때 저를 무서워했다는 것, 그리고 심적 고통이 그리도 컸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고통만으로 판단하고 속으로 아파할 고통을 생각 못 했던 것은 정말로 내가 나빴고 내 잘못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꺼내기 어려운 말들을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초래한 당신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너무나 미안하며 또한 용기 내어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더욱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


충분히 괴롭혔다. 약 두 달이라는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녀석에게 내가 겪은 성폭력의 피해를 똑같이 되돌려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나, 내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다 했고, 그리고 괴롭히고 싶은 만큼 괴롭혔다. 그 녀석의 거듭되는 사과도 들을 만큼 들었다.


이제 내 앞에는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내가 그렇게 피해 다니던 가해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고 나로 인해 겁을 집어먹은 한 작은 존재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연락을 취한 의도를 말하겠습니다. 그저 당신에게 이메일이나 가끔 보내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당신에게 과거의 잘못을 단순히 알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나마 지난 세월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기 위해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 요구사항을 이행하겠습니까?”


...


“내가 아무리 잘못을 빌어도 당신이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잘못에 대한 갚음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요구를 말해주십시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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