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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Aug 18. 2018

19.성폭력 가해자에게 요구한 세 가지

(18편에 이어서...)


"나는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크나큰 미안함과 두려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가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을 때, '이쿠! 들켰네. 너도 느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성폭력 가해자를 이메일로 몰아치면서 내가 느끼고 있던 그것, 그 괴롭힘에서 오는 잔인한 희열을 그도 정반대로 고스란히 느꼈었나 보다. 그럴 즈음이 되어서, 사실 나는 이 과정을 이제는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할 말도, 들을 말도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긴장도 많이 풀어지고,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내 안에 찌꺼기가 남아 있을까 봐,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에 다 쏟아내지 못하고 혹시 한마디라도 놓칠까 봐 끝으로 향해가는 길에 조금 시간을 끌기도 했다.


...

가해자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행할 것인지 물었고 그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 이행사항들을 직접 만나 공증을 받자고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끝맺으려고요."


성폭력 상담소에게 내가 보낸 이메일의 제목이다. 이제는 진짜 끝맺는 단계라고.


"현재 가해자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이젠 공증절차 만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해자에게 요구하는 내용 중 성폭력 피해자 쉼터로의 26년 동안 일정액을 기부하도록 하는 것
이 있는데요, 제가 적당한 쉼터를 알지 못해서 추천을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는 곳이 없어서요.

제가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소액이라도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며 그곳에서 나오는 소식지 같은 것을 통해 피해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희망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국에 있는 쉼터 중에 저처럼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머무는 곳이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추천해 주고 싶은 쉼터가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상담 선생님이 친절하게 한 보호시설을 추천해 주셨다.


"전국 쉼터 중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많은 곳을 추천받고 싶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전국의 많은 쉼터의 사정이 그러할 것 같습니다. 이 쉼터의 경우에도 내담자의 80%가 친족에 의한 성폭력피해 생존자입니다. 80% 이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이고요. 일상적인 의식주 지원과 함께 학교생활 지원, 문화예술지원, 성교육, 예술치유 프로그램 등의 지원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쉼터에서는 후원회원에게 매달 소식지를 보내드리고요 가해자도 쉼터의 후원회원이 된다면 이런 소식들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공증이니 내용증명이니, 뭐가 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평범하게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20대의 나는 그런 것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남자 친구의 친한 선배이기도 하고 법을 공부하고 있던 그 선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공증을 받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적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선배는 친절하게도 직접 공증문서를 작성해 주셨다. 돈... 아꼈다:)


돈도 돈이지만 사실 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선배가 작성을 해 주셔서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완전히 낯선 누군가에게 나와 가해자의 이름이 '갑'과 '을'로 들어가는 그 문서의 작성을 의뢰해야 했을 테니까. '갑'과 '을'이지만, 누가 봐도 남매임이 분명한 두 이름이 들어가는, 그리고 누가 봐도 성폭력과 관련된 그 공증 내용을 생전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의뢰를 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번 보고 다시는 안 볼 누군가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튼, 내가 가해자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환기시키고, 나의 분노를 표출하고, 사과를 받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에게 요구할 것들이 정리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구하고 싶었던 내용들이 줄어들었다. "아이고~의미 없다~"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처럼, 내 안의 생각들, 감정들의 군더더기들이 많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저 내가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만 내 관심사가 옮겨 갔기 때문일 것이다.  


1. 한국성폭력 상담소에서 진행하는 가해자 교육 10회를 받는다.

2. 피해자 쉼터에 앞으로 26년간 매달 1만 원씩 기부한다.

3. 가해자 교육이 끝난 후 심리상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다.


"심리상담을 받으라는 이유는 어릴 적 아버지가 당신에게 억압적으로 대한 것이 당신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화를, 그 억눌린 감정을 자신보다 약한 자신의 동생을 성적으로 학대함으로써 풀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심리상담이 필요합니다. 억눌린 감정을 약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이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면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바뀌면서 해소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억압을 가했던 사람을 원망하고 욕하면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바로 그 당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담을 권하는 것이나 1회 시행한 후 내 충고가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하지 마십시오. 말 그대로 내가 당신에게 친남매의 인연으로써 권하는 마지막 '선물'이니 받던 받지 않던 당신 자유입니다."


"소개받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쉼터는 친족 성폭력의 피해를 당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80%인 쉼터라고 합니다. 나와의 약속 때문에 억지로 기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소식지를 매달 받게 될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기부를 하도록 한 까닭은 그 소식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달 소식지를 받아서 읽어보며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를 이겨내고 성폭력 생존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지 알기 바랍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답게 살기 바랍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고 인간의 본분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가해자 교육 10회.


이게 다이다.


이 내용을 A4 용지 세장에 담고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나의 아픔과 눈물, 두려움, 공포, 가면을 쓰고 살아온 삶, 복수심, 증오... 이 모든 것들을 가볍디 가벼운 종이 세장에 다 담고는... 그렇게. 아무런 인연이 없던, 무미건조한 공증사무소라는 곳으로 향했다.


가해자를 직접 마주하기 위해.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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