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증을 받다. 그리고 나를 휘감는 이상한 감정
(19편에 이어서...)
2006년 6월 초 즈음이었던가... 오후 즈음이었던가.
명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친오빠인 성폭력 가해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내가 요구하는 세 가지를 따르겠냐고 물었고 (19편 참조) 그는 그러겠다고 했고, 내가 선배에게 부탁해 만든 공증을 위한 서류를 그에게 이메일로 보내 내용을 확인을 하도록 했고 그는 확인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 신촌에 위치한 공증사무소에서 만났다.
...
사실 그와 대면하는 것이 불편하고 꺼려졌다. 그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 자체가 아주 많이 거북했다. 이것을 굳이 꼬집어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뭐 좋은 관계라고 만남이 기다려지겠는가:) 그래서 아는 언니에게 나 대신 나가서 공증을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해 볼까.. 아니면 친구에게 나와의 동행을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결국, 혼자서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 성격 때문인 것 같다. 가끔 나는 나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하루에 50km씩 걷는 여행을 하고는 발바닥에 잡힌 물집들과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가지 말라고 하고 나 역시 막다른 길인 줄 알지만 굳이 끝까지 가 본 이후에야 단념을 하는 외골수 같은 기질 때문일 수도. 뭐 그리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여드름을 짤 때 어설프게 남겨두지 않고 끝까지 피를 봐야만 속이 시원한, 그런 성격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를 직접 대면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정도(正道)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그 순간은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깔끔하게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일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나 스스로 밖에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피한다고, 왕도를 택한다고 더 나아지거나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공증 사무소에서 그를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한... 한 시간은 같이 있었을까? 그보다 짧았을까?
우리는 미리 예약을 했던 공증 사무소에서 만나서 서류를 제출하고는 서류가 검토될 동안 아무 말 없이 잠깐 기다렸다. 우리에게 서류를 건네받고 서명을 하라고 알려주는 그 공증 사무소의 직원 앞에서. 낯뜨거웠다. 그 직원은 아마도 우리를,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니, 어쩌면 기억할 수도 있다. 특이한 경우 아니겠는가. 같은 성을 쓰고 같은 돌림자를 쓰는 남매가 와서 그런 종류의 서류를 제출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 직원분에게도, 서류를 법률적으로 검토하는 분에게도 흔치 않은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내민 그 서류뿐만 아니라, 나와 그 가해자 사이의 숨 막히는 공기 역시... 어쩌면 나만 기억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뭐 어떡하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 다... 그런 특이한(?) 주관적인 경험들의 일련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남들처럼 산다, 혹은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겠지.
몇 분 후, 서류 검토가 끝났고 나와 그는 직원이 시키는 대로 서류의 매 페이지마다 지장을 콕콕 찍었다. 그리고는 각자 한부씩 그 서류를 들고 사무소를 나왔다.
... 내가 먼저 말을 꺼냈던 것 같다. "커피 한잔 하자..."라고.
신촌 번화가에 위치한 반지하 커피숍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소파에 마주 앉았다. 종업원에게 각자 무언가를 주문하고는... 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던가? 그가 먼저 말을 꺼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 나는 것은, 그도 나도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는 것과 내가...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좀 많이 어리바리했다는 것이다.
공증을 받기까지 그렇게 매섭게 가해자를 쏘아붙인 씩씩한 성폭력 피해자라면, 왠지 더 멋지게, 더 쿨하게, 쎈 언니처럼 더 폼나게 가해자를 마주해야 하고,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의 내가 그때 그 커피숍에서의 나를 떠올려 보면, 이불 킥을 할 정도로 창피해진다. 나 그때 왜 그리 어설펐던가.. 왜 그리 바보 같았던가.... 후회하거나 속상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금의 서른 중반인 내가 보기에 그 커피숍에서의 내가 좀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
"왜 미리 얘기하지 않았니. 미리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잊고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억누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렇게 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살게 돼."
나 역시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쳐다보기는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내 동공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겠지... 아... 창피하다.
그의 말은 적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말이다. 그냥 마주 앉아 있는 상태에서 뭐라도 얘기를 해야 해서 꺼낸 말인 것 같다. 나의 말 역시, 적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미리 말했으면 뭐!?"라고 응대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있는 그와 나는, 사실 둘 중 누구 하나 제정신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처럼만 멋있었다면(?)... 좀 더, 마치 영화의 인상적인 한 장면처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난 그러지 못했다. 내 인생은 그런 폼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2006년도의 나는 그런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내공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내가 그와 다른 어떤 얘기를 했던가? 정말 신기하리만큼 기억이 없다. 분명 주문한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섰는데... 아무런 기억이 없다. 마치 과음하고 난 이후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분명 시간은 흘렀는데, 아무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을 짧은 시간 동안의 해리 현상...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까?
그와 커피숍에서 나왔다. 비가 막 쏟아질 것 같이 잔뜩 찌푸린 하늘이었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100m쯤 떨어진 지하철역까지 그와 같이 걸었다. 그는 지하철을 타야 했고 난 지하철 역 옆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그와 한 방향으로 나란히 걷다가 지하철 역 입구 즈음에서 내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마도 그날 하루 동안, 그렇게 똑바로 얼굴을 쳐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난 의도적으로 입가에 웃음을 띄게 했다. 물론 내 입꼬리에 묻어있는 어색함과 긴장을 다 지워버리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난 아마도 마지막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 기회에 나의 당당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승리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잘 가라. 살면서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살아라."
내가 했던 이 말은 비교적 분명히 기억이 난다. 그 순간의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 전의 것들과는 다르게 선명하게 떠올려진다. 비가 쏟아지기 일보 직전의 습하고 잔뜩 무거운 공기, 회색빛 하늘, 우리 주변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신촌 사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내 웃음 띈 얼굴과 그의 불안정한 눈동자가 마주치던 찰나. "너도"라고 말하며 다시 내 눈을 피하던 그의 굳은 얼굴.
악수를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지하철 역으로 걸어 들어갔고 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울 틈도 없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횡단보도로 향했다. 신촌 사거리의 횡단보도에는 여느 때와 같이 초록불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빽빽했고, 때마침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을 펴느라 더 번잡했다. 나도 왼쪽 팔에 끼우고 있던 우산을 펼쳐 들었다.
굳이 영화 같은 한 장면을 묘사하고 싶어서 꾸며내는 것이 아닌데... 진짜로 진회색 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에서 드디어 비가 쏟아지고, 횡단보도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 위로 쏟아지던 그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저절로... 라임이 맞춰지는군:)
이건 완전히 클리셰인데...;;; 우산으로 내 얼굴을 가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빗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로 내 목구멍을 밀치고 올라오는 이상한 소리의 울음을 감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걸으면서 참으로 많이도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렇게 내내 울다가 내 방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 울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한 감정도 들었다. 스물몇 살의 내가 거의 처음 느껴보는 굉장히 이상하고 강력한 감정이었다. 그와 악수를 하고 돌아선 그 순간부터 저 밑에서 부터 올라오는 그 생소한 감정... 처음이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그 감정 때문에 많이 당혹스러웠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도, 스무 살 넘어 이렇게 낯선 감정이 내 안에 훅! 들어선다는 그 사실 자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 당혹스러웠다.
가해자에게 잘못을 묻고, 따지고, 화를 내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를 받았는데... 그 일련의 과정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끝냈는데, 오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인데... 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감정 때문에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내가 기쁘지 않다는 그 이해되지 않는 사실 때문에, 좌절감도 조금 들었다.
'난 왜 기쁘지 않은 거야? 왜 홀가분하지 않은 거야? 왜 날아갈 듯 속 시원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이 감정은 뭐야? 이건 뭐 어떻게 다뤄야 하는 거야? 이건 언제까지 계속될 작정이야?'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