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ortbus Sep 15. 2018

21.성폭력 피해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 or 선물

: 공허감, 그 충만함에 대하여

(20편에 이어서...)


그렇게 성폭력 가해자를 만나 내가 원하던 절차의 거의 마지막 단계인 공증을 받고...

한 이틀 정도 지났을까? 여전히 난 기쁘지가 않았다. 6월인데 마음의 온도는 높지 않았다. 추웠다. 아니다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도 아니었다. 사실 슬플 이유도 더 이상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밝고 긍정적인 마음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시리다? 아니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온도의 높고 낮음으로, 색의 밝고 어두움으로 묘사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차라리 긍정이나 부정, 흑과 백, 뜨거움과 차가움..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감정이면 소화해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꽤 익숙하게 다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내 안에 쑥 들어온 그 감정의 덩어리는 그런 낯익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 친구에게 따뜻한 격려를 받아도 시원한 미소로 응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작정.. 곧 괜찮아지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며 무력하게 그 낯선 감정을 수동적으로 마주하고 있을 수밖에.




며칠 뒤, 학교에 있는 성폭력 상담소에 상담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상담은 이미 끝났지만 가해자와의 만남에 대해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의 만남. 난 웃음을 띈 얼굴로, 힘이 좀 빠져있는 웃음이었지만 아무튼,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다 잘 만났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이게 뭔지. 마음이 이상해요. 기쁘지도 않고... 뭔가가 굉장히 이상해요."


별 기대 없이 선생님께 던진 질문.


"공허감일 거예요. 이제는 가해자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오롯이 00씨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들만이 남아 있으니까."


....


아....!


선생님이 1초의 틈도 없이 톡 던지듯 내려주신 진단.

공허감.


공허감이라...


선생님의 그 짧은 한마디에 눈 앞의 안개가 휙 하고 걷혀버렸다. 나의 작은 눈이 그 순간, 심청이 아버지가 눈을 뜨듯, 번쩍 뜨였다.


'그래! 이게 그거로구나. 이게 공허감이라고 하는 건가 보다.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맞는 것 같아.... 이제 그 녀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 가해자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결국 남은 것은, 다음 절차는 내가, 바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천할 일들만이 남아있구나.'


'텅 비었다는 것, 완전히 비어버렸다는 것. 그 공허하다는 것이... 그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그게 바로 이런 거구나...'


그리고 뒤따라오는 생각, 판단, 혹은 결심.


'... 받아들이자.'


원망할 대상이 있을 때, 증오할 대상이 있을 때가 오히려 안정적인 상태일 수 도 있다. 사람은 모호함, 불확실함 보다는 선명하고 명확한 것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니까. 그것이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내 안의 어떤 커다랗고 무거운 감정의 덩어리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때가 더 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내가 마주하고 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쑤욱! 하고 뽑혀져 나갔을 때, 마치... 커다란 구멍이 내 안에 생겨버린 느낌, 어쩌면 그 구멍이 나 자신보다 더 커서 나의 존재 자체가 바로 그 구멍인 느낌. 그렇게 완전히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상담 선생님의 따뜻한 포옹과 "00씨는 이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거에요."라는 격려를 마지막으로 난 상담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그 곳에 찾아갈 일이 특별히 없게 되었다:)




상담 선생님 덕분에 내가 인지하게 된, 내가 마주하고 있던 그 현실은, 성폭력 가해자와의 관계 안에서 피해자로서의 내가 아닌, 즉 어떤 관계 안에서 규정지어지는 내가 아닌, 철저하게 독립된 존재로써의 내가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넓은 벌판에 홀로 던져진, 아무것도 모르는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이.


그러니, 그렇게 십몇년동안 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던 방식에서 처음 그렇게 벗어나 본 것이니, 그 관계 안에서 뽑혀져 나온 것이니, 생소한 감정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고 헤맸던 것이 당연하지..


'받아들이자. 이게 내 인생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내 인생이다. 다른 누구의 것과 바꿀 수도 없고 바꾸고 싶지도 않은 내 인생이다. 바로 내 것이다.'


'이제 남은 일들은 다, 모조리 다 나의 일이다. 그 녀석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도 없고 요구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나의 일이니, 내가 안고 내가 해결한다. 이제부터의 나의 일은 더 이상 그 녀석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까.'


공허감이라고 그렇게 한번 명명되자, 그 비워짐은 오히려 다룰만했다. 사실 특별히 다룰 것도 없었다. 그저 '아.. 그렇구나. 내가 지금 뻥! 하고 비었구나.. 그런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끝이 났다. 시작을 위해서 비움은 언제나,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공허하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색깔을 띠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비움이란, 비워짐이란, 새로운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 손에 무언가를 꽉 쥐고 놓지 않고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 새로운 대안들, 모험이 가득한, 다소 낯설지만 설레는 기회들을 그냥 떠나 보내왔던가:)


이십 대 중반의 나는 그렇게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애초부터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게 더 재미있지 않은가? 인생이 의도한 대로만 간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내일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겠지.


난 이렇게, 아직은 낯설고 어색해서 갓 태어난 노루 새끼처럼 비틀비틀 거리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단계에 이르렀는데... 가해자인 그 녀석은 아직 해결해야 할 단계가 좀 더 남아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피해자고 그 녀석이 가해자인데! 좀 더 길게 고생해야지:)


그 녀석은 공증 내용대로 한국성폭력 상담소에서 가해자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쉼터에 매달 기부금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게 이메일로 알려왔다. 솔직히 그때는 그 녀석과 이메일을 주고받는다는 것 조차 귀찮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내 관심 밖의 일이 되었기에..) 그래도 끝까지 관심 있는 척, 지켜보는 척하며 응대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녀석이 가해자 상담을 다 마치고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과문이었다. 정식 사과문.

 

To be continued...


:)

매거진의 이전글 20.성폭력 가해자를 직접 만난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