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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Feb 19. 2018

3.성폭력 가해자인 너를, 용서한다.

: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던져주는 선물

*혹시 제목 그 자체로 화가 나거나 불쾌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끝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제 글을 읽어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살인자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끔찍하게 잃은 사람들이, 결국은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장면들을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천사인가? 바보인가? 너무 무력한 것 아닌가?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


그랬던 내가 나에게 성폭력을 가한 가해자인 나의 친오빠에 대해서 지금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글의 제목을 결정하면서 마음이 그리 편치 만은 않았다. 이 제목 자체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폭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상담 선생님과의 첫 상담 이후, 그분이 마무리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주 아주 나중에 가해자를 만나면, "오빠 네가 옛날에 날 만져서 내가 진짜 화가 많이 났었잖아."라고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불쾌했다. 화가 났다. 내 상처를, 내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상담 선생님으로서의 자질도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고, 하고 싶지도 않다. 또한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전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나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나는 그를 용서했다고.

이는 철저히 피해자인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다.




햇살이 유난히도 눈부시게, 개나리 빛으로 창문을 통해 집안을 비추던 , 부모님과 난 거실에서 조그만 개다리소반에 둘러앉아 소박한 점심을 먹고 있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려야  정도의 유난스러운 햇살이  등을 때리듯 비추고 있다. 저쪽 구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두 컴컴하게 응달이 있고 그 녀석이 잔뜩 주눅이 든 채 벌서듯이  있다. 어깨는 경직되어 각이  있고 살짝 숙인 고개를 통해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 느껴진. 그 녀석이 어릴 적 하던 바가지 머리는 그 녀석의 눈썹까지 덮고 있다. 꽉 닫힌 그의 입술은 어른들에게 혼나기 일보 직전인 어린아이의 그것이다.  녀석은 밥을 먹고 있는 우리를 향해 서 있지만 차마 오지 못하고 잔뜩 추워 보이는  계단 아래에서 몸을 응달에 반쯤 숨긴 채  있다. 나는 모른 척하고 밥을 계속 먹었지만 점차 그 녀석이 안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예쁘거나 아껴서가 아니라 성가시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아무튼 그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루와서  먹어.”


내가 그 녀석에게 건넨 말이다.  말투에는 귀찮은  짜증이 묻어 있었지만 분명히 외톨이가  어린 

그 녀석을 향한 동정심도 있었다. 그때 알았다. 꿈속에서도 알았고, 꿈에서 깨고 나서도 알았다. 분명 꿈속 그 따가울 만큼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밥을 먹고 있던 것은 성인 나였고 응달에서 벌을 서 눈치를 보며 서 있던 그 녀석은 어린 나의 오빠였. 난 어른의 모습이었고 가해자인 그 아이였다. 그리고 어른인 내가 어린 가해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그때 알게 되었. 나의 상담이 끝나가고 있고, 내가 그를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상담치료를 받던 봄의 어느 날,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펑크 난 학점을 메꾸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는 우연히 책 한권을 발견했다. "용서란 무엇인가 (정확한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책은 도서관 통로에 열 맞춰 서 있는 책장의 가장 바깥쪽, 내 눈높이 즈음에 꽂혀 있었다. 천주교 관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고, 이 세상 어떤 종교에도 편견이 없는 나이기에 그 책을 책장에서 즉흥적으로 뽑아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나의 가해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은 다 훑어 보았다. 십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한 문장.


'용서란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논리적으로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용서에 대한 정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용서란 당연히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어쩌면 용서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용서란 그걸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던져주는 그런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이란 말에 울림이 왔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인 그에 대한 용서를 고민해야 할까? 그 책에서는 용서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거나,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가해자와 다시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내가 그 사건, 그 기억, 가해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힘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도 무심해지는 것. 집안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가구를 우리는 매일 의식하지 않는다. 대청소를 할 때 버리 수도 있겠지만, 또 딱히 힘들여 버릴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한다. 말 그대로 '있거나 없거나.' 또 옆 동네의 편의점이 오늘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는 무심하게 흘려듣는다. 말 그대로 '그러거나 말거나.' 이게 바로 현재 내가 가해자를 인식하고 있는 방식이고 난 이것을 피해자인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한 가해자에 대한 용서라고 부른다. 이제 나와는, 내 인생과는 무관하게 된 그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나와 무관한 사람을 미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오늘날의 MeToo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분노를 표하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를 당당히 지목하고 분노를 표하고 있는 단계. 필요한 단계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매분 매초를 분노한 상태에만 머물러 살아갈 수는 없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도 살아내야 하기에. 가해자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너무 오래되고 너무 커져서 이제는 그렇게 가해자를 향해 목소리를 낼 힘조차, 의지조차 남아 있는 않은 피해자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유행하는 우스갯소리, '하느님, 저 놈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라는 말처럼, 내가 파괴되어도 좋으니 저 놈만은 죽이고 싶다...라는 감정을 진심으로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증오라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감정인지. 사람을 매일 긴장 속에 살게 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 결국 성폭력 피해자의 삶은 피해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로 인해 갉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삶을 망가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권리가 있다.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난 여전히 겁이 난다. 내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 아픔, 그 후유증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에, 10명의 피해자가 있다면 각기 다른 10가지의 고통이 있을 텐데, 내가 나만의 경험과 감정들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까...


하지만... 그래도.


끔찍한 살인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아마도...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은 잃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용서라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괴로워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죽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니까. 이것이 내가 나의 가해자에 대한 길고 긴 증오의 터널을 지나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만약 나의 추측이 맞다면, 나의 용서도 그와 유사한 동기에서 선택된 것이다. 그깟 녀석을 위해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나의 그 어떤 것도, 가치 없는 존재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한 사고들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아팠던 만큼,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그 녀석에 의해 구겨졌던 만큼, 더 이상은 내 인생의 단 일초도 낭비고 싶지 않아서. 난, 소중하니까 (응?!).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그 녀석에게 용서를 던져주고 난 그 증오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러니.. 나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상황이, 감정이 무르익으면 의식적인 작용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가능해지는 단계로서의 용서. 하지만 그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상황을, 감정을 무르익게 하기 위해서는 피해자 스스로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란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선생님, 상담을 받으면서 느끼게 된 건데요, 이제는 옛날 하고는 다르게 칼자루를 제가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찌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칼자루를 잡고 찌를 수도 있지만, 그냥 내 마음 편하고자 살려 보내줄 때, 그것이 내가 선택한 용서이다.


그래서 난,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더 사랑하고 그만큼 더 치유에 힘쓰면, 그 뒤의 단계들은, 그 이름이 용서이던 다른 무엇이던, 피해자들을 그 증오의 족쇄에서 자유롭게 해줄 그 무엇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외면하지만 않으면, 스스로에 대한 긍정과 확신만 놓치지 않는다면.


물론, 피해자가 내면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난 이후, 가해자를 직접 대면할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나의 경우는 직접 대면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가해자에 따라 직면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항상 case by case.


건투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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