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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Nov 04. 2018

26.몹쓸짓? 아니죠~ 성폭력이죠!!

: 아버지, 삼촌이 가해자로 예시되는 독일의 성폭력 교육

일관성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곳에 글을 쓰면서 한 가지 반복한 것이 있다면, 매번 제목에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부러 모두 성폭력이라고 지칭했다.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의 구분으로 피해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피해 당사자자가 아닌 사람들이 함부로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더 이상 금기의 단어가 아니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절도나 강도사건처럼, 모두가 함께 걱정하고 모두가 함께 분노하고 모두가 함께 예방에 힘써야 하는 일반적인 사고나 범죄처럼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단어를 최대한 많이 노출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지칭하는 성폭력피해 생존자라는 용어도 있지만, 나는 '피해자'라는 용어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할 수 있고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냥 피해자라고 했다. 피해자라는 용어가 은연중에 내포할 수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한 것으로 피해 생존자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미 있는 시도라고는 생각한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언론과 일반 사람들이 성폭력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마치... 액자 속에 있는 그림을 보거나 연극 무대 위의 가공된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 해온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성폭력은, '폭력' 아닌 '' 방점을 찍음으로 일반범죄 영역이 아니라 민망하고 남사스러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소재로써 받아들여져   같다. 하긴, 옛날부터 성폭력이라는 범죄를 지칭하는 객관적인 용어보다는 '몹쓸 짓'이라는 애매하고도 온정적인, 약간은 문학적이기까지 한 용어로 통칭되어 온 것이 사실이니.

 

무대 위의 연극이나 액자 속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충분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있고 또 감정 이입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튼을 내려 버리면, 관(람)객들은 언제든 등을 돌려 다시 자신이 속한 현실로 돌아간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나 슬픔은 직면하지만, 그 임계치를 넘어가 버리면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모금운동을 할 때 굶주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사진보다는 큰 눈망울로 천진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활용하는 것과 유사한 논리이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문제는, 성폭력의 피해자는 본의 아니게 그 액자 속의 그림의 한 부분으로, 연극 속의 한 인물로서 가두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그 누군가로 말이다. MeToo 운동 덕분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만한 유명인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언론은 대서특필을 하고 있으며 누리꾼들은 온/오프라인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가해자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유명인들이 가해자인 사건은 일반인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마치 영화나 연극을 보고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에게 분노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일상과 더 가까운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가정 내에서의 성폭력 사건은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무대에서 내려와 현실 속의 이야기로 이해될 것이며, '몇몇 소수의'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의 이야기로 인정받을까... 가족 내에서의, 직장 및 학교 내에서의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고, 특이한 어떤 소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누구나'의 이야기로 직시될 때 만이 이 범죄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정부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정책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고 예방과 치유를 위한 교육의 방식 역시 현실적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독일에서 아동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성교육에 잠재적 가해자로 아빠, 삼촌 등 적나라하게 거론되는 것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피해자이면서도 말이다. 내가 독일의 어린이와 같이 이런 교육을 받았더라면... 성폭력 자체를 막을 수도, 혹은 막지는 못했더라도 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좀 더 빨리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까. 내가 근 10년간 직적으로 알게 된 친족 성폭력 피해자만 해도 10명에 달한다. 내가 피해자만을 끌어당기는 자석도 아닐 것이고,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난 그저 대학생, 직장인, 그리고 대학원생... 의 삶을 살아왔는데도 내 지인들과 그들 주변에서 10명의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있었다. 물론 친족 성폭력이 아닌 경우는 훨씬 더 많았고.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는 것 뿐. 

 


감히, 건방진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당신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이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일까요? 아니면, 혹시 당신의 지인들이 당신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반대의 질문도 던지고 싶습니다.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타인과 나누어 본 적이 있나요? 차마 수치스러워서 입을 열지 못하겠나요? 그것만 지우면, 당신의 인생이 동화처럼 예쁘고 흠 없는 인생이 되나요?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예쁨일까요?


혹시... 당신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떠날 것 같나요? 당신의 진정성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신 옆에 수십, 수백 명이 있다고 한 들, 당신은 그들 사이에서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나요?


당신을 보여줬다고 해서 당신 곁을 떠날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라도 훨씬 어이없고 사소한 일로 당신을 떠날 사람들이라고... 감히 제 의견을 전해 봅니다. 당신이 그들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 곁에 머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우린 모두, 미완성의, 불완전한 인간들이니까. 하지만 멈추지도 말았으면 좋겠어요. 참으라고, 입 다물라고, 가면 쓰고 살라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의지하고 그들이 정의 내린 예쁨이란 틀에 갇혀 살라고... 그러라고 태어난 인생 아니잖아요. 그런 인생은 없어요:)


니체가 영원회귀설을 얘기했지요.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지금 당신의 삶은 만년 전의 당신의 삶이기도 하고 만년 후의 당신의 삶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영원히 회귀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곳'의 당신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목소리를 낸다면, 만년 전의 당신도 목소리를 내었을 것이며 만년 후의 당신도 목소리를 내며 살고 있을 거예요.


건투를 빕니다:)


To be continued...

*짜잔~ 다음 편이 마지막 편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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