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ortbus Oct 27. 2018

25.만약 또 성폭력을? 그래도 난, 괜. 찮. 다.

: 아프겠지. 하지만 세상의 끝은 아닐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지,


사실 조금 주저했다. 다른 분들이 내 글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 아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비밀도 뭐도 아니었기 때문에 얼굴과 실명을 굳이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성폭력 피해를 겪어보지 못한 분들은 사실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그냥,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이런 일을 이렇게 해결한 사람도 있구나...' 이 정도의 감상이 남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나중에라도 그분들이 성폭력에 노출된다면, 그때 내 글을 기억해 내셔서, 조금은 더 씩씩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성폭력을 겪으신 분들이 걱정된 것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이제 겨우 진정시키며 일상을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의 고요한 일상에 내가 괜한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흙이 가라앉아 이제야 겨우 샘물이 맑아졌는데 눈치 없이 계속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성폭력 사건이든 그 일을 해결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분들의 과정이 나의 과정보다 훨씬 더 울퉁불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는 우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잔잔한 호수에 계속 돌멩이를 던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 했다. 왜냐하면, 끔찍한 예언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성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던 없던, 우리들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성폭력이라는 것을 절대 마주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성폭력에 노출될 기회는 아직 널리고 널렸다는 것이 사실이니까.

 


당신은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는가?

 

괜찮다.

 

첫 싸움에서 졌는가? 혹은 몇 번의 싸움에서 연거푸 졌는가?... 그래도, 괜찮다.


왜냐면, 다행히 혹은 안타깝게도, 싸울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널리고 널렸으니까. 다음에 씩씩하게 싸워 이기면 된다.

 

성폭력에 노출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너 지난번에도 당했으면서 또 당했어? 너 바보니? 네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한번 당했으면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야지... 또 당하냐... 어휴...”


혹은 더 극단적으로,

"너 꽃뱀이니?"

 

하지만 이 전에 내가 썼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난 여러 번, 아주 많이 성폭력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구분하지 말자. 여기는 법원이 아니니까.)에 노출되었었으니까. 초등학생 때 친오빠에게, 중학생 때 길 가는 오토바이 10대들에게, 고등학생 때 바바리맨, 대학 때도 어두운 골목에서 날 표적으로 삼고 기다리던 어떤 남자에게. 그리고 택시 기사에게. 여행지에서 현지 할아버지에게. 기타 등등. 그 이후에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앞으로도 난 내가 안전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바보인가? 아니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성폭력을 하나의 단일한 범죄로 묶어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잠깐만 생각해 보면,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청소년 때 깡패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한테 삥을 뜯긴 적이 있다고 해서 오래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지 말라는 법 있나? 교통사고를 당하고 깡패에게 삥을 뜯기고 오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봤다고 해서 길거리의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말라는 법 있나?

 

당해본 사람은 안다. 성폭력이 어찌나 참신하게 매번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오는지.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눈 빛으로, 때로는 글로, 때로는 말로...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학교에서, 때로는 집에서, 때로는 길거리에서, 때로는 차 안에서. 또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동네 이웃의 얼굴을 하고, 선생님의 얼굴을 하고, 친구의 얼굴을 하고, 동료의 얼굴을 하고...

 

그러니, 첫번째 피해가 피해자의 탓이 아니듯, 또 다른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절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당해도, 괜. 찮. 다. 는 것이다.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프다. 끔찍하게 아프고 두고두고 아프다. 하지만, 세상의 끝은 아니라는 것이고 스스로를 탓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이다.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600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가 아닌 이상 (이분들을 안다면 최소 30대 이상;;), 어떻게 매번 다른 방향에서 다른 속도로,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다 피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어디서 어떻게 돌멩이가 날아오고 있는지에만 집중을 하다 보면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주인으로써 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하는 애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잠재적 피해자로 여기고 스스로의 자유와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마치 어미 곰이 새끼곰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가르치듯이, 피해를 당했을 때 싸워서 이겨내는 법을 서로 나누고 또 배우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넘어지지 않는 것을 배우기보다는 어떻게 다시 일어서느냐를 익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들보다 조금 운이 부족해서,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 다른 이들의 아스팔트 길과는 달리 자갈밭이라서, 몇 번을 연거푸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해도, 포기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아니까. 나는 반드시 다시 일어서고 말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니까.

 

그러니, 여러 가지 이유로 돌멩이를 피하지 못해 거듭 멍이 들고 상처가 낫다 해도, 우리는 괜. 찮. 다.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제발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불행을 맛본 사람은, 계속 불행해지기 쉽다. (젊었을 때 고생? 절대 사서 하는 것 아니다.) 몸의 면역력이 약해지만 잠잠했던 지병들이 도지고,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제일 먼저 탈이 나는 것처럼, 한번 불행을 겪은 사람들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정신적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과거의 아팠던 기억이 나를 삼켜버리기 쉽다.


억울한가? 그럴지도. 그러나 이제부터는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억울해할 겨를도 없다는 뜻이다. 당신, 타인에 의해 불행을 겪었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한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을 해야 한다. 세상은 원래 공평한 것이 아니니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억울해하거나 원망하며 주저앉을 시간이 있다면,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씩씩하게 행복을 쟁취하느냐... 그 방법이 뭐든 간에, 그것만 생각하자.


건투를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24.성폭력 사건의 매듭, 내 작품의 한 부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