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을 쓰고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경찰에서는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고 나도 바쁜 일상을 보내는 터라, '잘 진행되고 있겠지?'라는 생각만 갖고는 일상을 보냈다.
나의 일상에 추가된 것은 1~2주에 한번씩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주는 약을 아침저녁으로 먹는 것이다.
솔직히 매일매일 피해 사실이 떠오르거나 가해자를 떠올리며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약을 꼭 먹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약 1주일이 이틀 정도는 밤에 복잡한 생각들이 밀어닥치게 되고 그럴 때면 새벽 4~5시까지 잠에 못 드는 날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밤을 새우면, 그다음 날은 어찌어찌 버티지만, 이틀 뒤에는 출근을 못하거나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뻗어 버리기 일수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약을 먹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사 선생님 왈, 저녁에 먹는 약은 공황장애가 있는 환자들에게 쓰는 약이라고 한다. 내가 공황장애가 있다는 건 아니고, 그런 분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해 주는 약이라고 하는데 내게도 정신적 긴장을 풀고 나른하게 이완시키는 처방이 필요해서 그 약을 주신다고 했다.
그렇게 신경정신과에서 진료받고 처방받은 비용은 한국여성의전화에 영수증을 보내서 보전받고 있다(아직 받은 것은 아니고... 영수증을 보내면 보전해 준다고 한다). 다시금, 너무너무 감사하다ㅠㅠ
지난달(4월)에는 가해자가 소속된 '대단한' (임시) 조직에 제보 문서를 넣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그 조직의 인사에 관여하는 사람을 찾아 가해자에 대한 제보를 했다. 그리고 제보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정보공개' 사이트에서 나의 '진술서'와 '경찰신고사실 확인서'를 요청하기도 했다 (발급까지 최장 2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론은, 그 조직은 미동도 보여주지 않았고 인사에 관여하는 그 사람은 내게 정중하게 대하기는 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 조직이 나의 제보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포기했다. 그 조직은 5월 초에 해산했디.
'그래... 성추행, 그것도 아직 조사 중인 사건이고, 가해자도 어마어마하게 영향력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길게 보자.'
이렇게 나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성추행 신고 후 3개월이 다 되어가자 (3월 2일 신고), 지난주부터 국선 변호사님과 상의하여 경찰서에 사건 진행 상황을 문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찰서 형사님들의 일상이 그런 것이겠지만, 연락이 너무 닿지 않았다. 전화를 하면 아무도 안 받기가 일수이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아도 내 사건은 담당하시는 분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야간 근무를 하시고 아침에 퇴근하셨다고, 이틀 뒤에 다시 전화해 보라는 말만 두어 번 반복해서 들었다. 내 전화번호를 남겼음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오전 9시 땡 하자마자 다시 전화를 했고 드디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쁘셔서... 연락을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하시고는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셨다.
우선, 사건 당일 가해자의 차를 대신 운전한 대리기사를 조사하기 위해 영장을 보내 놓은 상태이고,
참고인들 (술자리에 동석했던 분, 사건 이후 내가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던 나의 지인들)을 다 조사했고,
이제는 경찰에서는 내용 정리를 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경찰의 팀장, 과장, 수사 심사관의 판단을 통해 검찰로 송치. 이 경우 검사의 추가 조사가 있고 혐의에 대한 처분은 검찰의 몫이다.
둘째, 경찰의 팀장, 과장, 수사 심사관의 판단을 통해 사건을 불 송치. 이 경우 나는 이의 신청을 하여 검찰에서 한번 더 판단을 받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5월이 지나기 전에 어쨌든 경찰에서는 둘 중 하나로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석 달 동안, '조사가 잘 되고 있겠지?', '언제 조사가 끝나지?'라고 생각하며 경찰의 역할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솔직히 오늘 담당 형사님과 통화를 하고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때 대리기사에게... 내가 너무 씩씩하게 집 주소를 불러줬던 것 같은데...'
'대리기사에게 내가 너무 평범하게, 아니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 밝게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던 것 같은데...'
'수사 심사관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20년 경력이라는데... 내가 늦게 신고한 상황을 이해할까? 의심하지는 않을까? 그때 바로 신고했어야 하는데...ㅠㅠ'
이렇게...사실 다시금 생각해 봤자 소용없는 자기 검열들.
분명히, 다른 누군가가 내게 상담을 한다면, "괜찮아, 성범죄 피해자들의 1차적 반응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아. 성범죄의 특성이 그래.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문제가 되다 보니, 자꾸만 후회되고, 긴장되고, 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나의 기민하지 못했던 행동이 나의 발목을 잡을까 봐. 경찰조사 과정은 나의 무오류성, 나의 선함, 완전함, 또는 현명함을 판단하는 과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두렵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경찰의 조사가 끝나고 판단만 남았다고 하니... 오히려 더 걱정이 커졌다.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새로운 국면이 열릴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