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ortbus Apr 22. 2022

성추행 해소 과정: 허락은 필요 없다!

상담은 OK! Don't need permission!!

3월에 성추행 사건을 고소하면서 나의 마음은, 그리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나의 글은, 

어쩌면 발랄하기까지 했다. 

분노와 이에 맞서는 적당한 전투력과 긴장감, 그리고 이 감정들을 감싸는 자기 확신과 희망. 


그러나 그런 단단한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가해자의 지위가 올라가고 권력이 커지고 인지도가 올라갈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분노 대신 조바심, 전투력과 긴장감 대신 두려움, 그리고 자기 확신과 희망이 아니라 막막함과 우울함.


이 상태가 약 일주일은 간 것 같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 울기. 가해자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신경정신과 약이 몸에 잘 맞지 않는지 병든 닭처럼 엎드려 있기, 무기력과 소외감, 기타 등등. 


그동안 여기 썼던 글도 그렇더라. 주식시장에 데드크로스가 일어나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추세선처럼... 내 감정이 곤두박질치고 글도... 우울함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네. 나 스스로 걱정할 만큼.


그런데 나를 우울함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은, 성추행의 기억,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사건의 피해자이자 사건 해결의 주체인데, 내가 자꾸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생기는 마음 작용이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한국여성의전화와 국선 변호사에게 상의를 해 봤지만 그분들도 뾰족한 수를 내어놓지를 못했다. 가해자는 공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 조사 중이고 법적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으니까.


이런 전문가 분들이.. 뭔가 지금 당장 취할 조치가 없다고 하니...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답답했다. 

그리고는 "이런 방법은 어때요? 아니면 요건 어때요?" 하고 자꾸만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분들이 내 사건만을 맡아주고 계신 것도 아닌데... 나는 본의 아니게 자꾸만 보채게 되었다.


그분들에게 정답을 듣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반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점검받고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허락을 받고 싶었다. 혹시 내게 불리한 일을 스스로 하게 될까 봐. 


일견 필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그분들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사건의 피해자이자 사건의 주체인데.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한 발짝 내딛을까 말까 주변에 물어보고 있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음... 이건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뉴스공장'을 통해 나의 아침을 매일 열어주는 김어준 씨가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내 행동에 대한 책임만 질 수만 있다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던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어요."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맞아. 나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뭐지? 지금 당장 답답하고 숨도 못 쉬겠는데... 이렇게 남들의 "Yes"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내게 유리한 것인가?'


'어차피, 증거도 증인도 없어. 나한테 유리한 것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 고소한 거잖아. 명예훼손을 걸 거라는 건 당연한 일이고... 더 이상 나빠질게 뭐 있다고 이렇게 한 발짝도 못 움직이지?'


'내 사건인데, 내가 사건의 피해자인데 뭐하려고 내가 중립을 지키고 있지?'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그 책임만 지면 되는 거 아냐? 그게 뭐라든... 그게 미래에 나에게 불리한 것이든,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든... 그 책임만 회피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그래서...

제보서를 만들어서 여기저기에 보냈다 (제보서를 만들라는 것은 한국여성의전화의 조언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고, 현재 가해자는 강제추행 피의자로 조사 중이기에 당신들의 그 '고매한' 조직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경찰신고사실확인서’와 ‘진술조서 사본’을 정보 공개하도록 신청해 놨으니 제출할 수도 있다... 등등의 내용을 담은 제보서를 만들어서 가해자가 속한 조직의 인사 담당, 나름 고위직, 제보 창구 등으로 보냈다.  


제보서에는 아래와 같은 법조문도 담았다. 물론, 그 사람은 지금 당장은 공무원이 아니고, 지금 당장은 법적 결론이 난 것이 아니지만... 


*국가공무원법 제33조 6의 3.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에 규정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후 3년이  지나지 아니한 사람


*국가공무원법 제73조 3(직위해제) 6. ‘금품 비위, 성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위 행위로 인하여 감사원 및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조사나 수사 중인 자로서 비위  정도가 중대하고 이로 인하여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기대하기 현저히 어려운 자는 직 위를 부여하지 아니할 수 있다’



안다. 

부질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지금까지도 아무런 피드백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가해자는 그 '대단한' 조직에 잘 붙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의 내 고소가 불발이 된다면... 앞으로 더 승승장구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나의 마음에는 작은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울의 늪에 처박혀서, 아침에 실눈이 되어버리도록 엉엉 울며 밤을 지새우던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의 노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판단해서 내가 행동했다는 것.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내가 스스로 다 감당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취한 행동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의지가 생기며

나는 우울에서 한발 벗어났다. 


청승, 자기 연민... 이런 초라하고 자기 파괴적인 단어들에서 한 발자국 멀어져 가고 있다.

"에게~ 겨우 저거 한 거 가지고 뭘..."이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거. 내겐 그게 중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폭력피해자가 기대하는 한 가지, 공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