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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Jun 08. 2022

성추행 고소 불송치 결정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ㅜㅜ

3월 2일 고소, 6월 7일 경찰 조사 최종 결정. 불송치.

불송치라 함은, 경찰에서 검찰청으로 사건을 넘기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사건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증거라...

사건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술을 많이 마신 그날 밤, 가해자의 차 뒷좌석에서, 대리기사가 오기 전, 약 5~10초 정도의 추행.

2. 날 때린 것도 아니고, 강간한 것도 아닌 상황. 즉, 나의 신체에 가해자의 어떤 물증도 남을 수 없는 상황.

3. 만취한 상태에서 내가 한 말은 "결혼까지 하신 분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 그리고는 정신 잃음.

4. 그다음 날 가해자에게 전화하여 네가 어제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구두 메시지 전달.

5. 당시 한국에 막 귀국하여 이쪽 업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인맥들이 엮이며 굴러가는지 잘 몰랐음. 그저 단순히, 같은 전공이지만 연구분야가 전혀 다른, 그 가해자를 다시는 안 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똥 밟았다 여기고 덮으려고 마음먹음. 돌이켜 보면, 직장상사의 후배였기에 내가 소극적인 결정을 했던것 같음.

6. 같이 일하는 동료 2인과 친구 1인에게 내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함.

7. 가해자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직장 상사에게 '그 사람이 내게 아주 큰 잘못을 했다. 앞으로 그 사람 얘기 내 앞에서 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 전달.

8. 직장 상사는 나의 의사를 존중하였고, 그 후 약 9개월 간 가해자와 만난 적도, 가해자에 대해 소식을 들은 적도 없이 지냄.

9. 그러다가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하면서 가해자와 내가 동시에 팀원으로 소속됨.

10. 직장 상사에게 "전 저를 성추행한, 제 몸을 함부로 만진 사람과 어떤 소통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내게 큰 잘못을 했다고."라며 항의함

11. 직장 상사는 당시에 '큰 잘못'이란 것이 성추행이었는지 몰랐다며, 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와 가해자가 만나지 않도록, 서로 소통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 나름 배려함.

12. 한국에서 약 1년간 이쪽 업계에서 지내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가해자에 대한 소식, 평판 등을 전혀 듣지 않고 지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파악하게 됨.

13. 늦었지만, 고소하기로 결심.

14. 3월 2일 경찰서에 고소를 하고 국선 변호사 소개받고, 한국 여성의 전화와 소통하며 사건 진행 여부를 예의 주시함.

15. 그 와중에 가해자가 'OOO인수위원회'라는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동료로부터 전해 들음.

16.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던 가해자에게 그 꿈의 실현을 위한 좋은 기회가 열렸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그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생활과 심리가 굉장히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함.

17.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바로 신경정신과를 찾아가서 상담과 함께 약물 복용 시작.

18.  한국 여성의 전화의 조언을 받으며 'OOO인수위원회'에 제보 문서를 넣음. 임시조직이라 정식 창구가 없었고 사건도 마무리되지 않은 조사 중인 사건이라 복수의 루트를 통해 제보를 하였지만 아무 반응 없음.

19. 할 수 없이 경찰 조사의 결과를 기다림. 경찰은 내가 성추행 사실을 말했던 2명의 동료와 1명의 직장상사에게 전화를 하여 나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함.  

20. 고소한 날로부터 3개월이 지난 현시점에 받게 된 결과, "불송치"


위의 내용 중 내가 가장 후회하는 지점은 바로 5번이다. 나의 섣부른 판단으로, 내가 스스로 덮으려고 마음먹은 것. 이쪽 업계가 얼마나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지 무지한 상태에서, 그저 똥 밟았다는 심정으로 넘어가려 한 나의 오판.


변호사님 왈, 내가 그 당시 바로 신고를 했다면 cctv 확인을 했을 수도 있고, 차의 블랙박스 기록을 확인했을 수도 있은 텐데... 그 기회를 놓쳤고,

또 사건 다음 날 구두가 아닌 문자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아니면 녹음이라도 했다면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 좀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을 텐데... 그 기회도 놓쳤다.


어쨌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결정은 이의신청을 하여 한번 더 경찰이 조사를 하게 하느냐, 아니면 여기서 접느냐 이다. 이의신청을 하던 하지 않던 검사는 이 사건에 대해 확인을 한다고 하는데, 이의신청을 하면 좀 더 꼼꼼히 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 새로운 증거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음...

친한 변호사 친구는, 애초에 가해자의 사건 기록을 남겨 다음에 혹시 발생할지 모를 또 다른 피해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높이고자 했던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이상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피해자가 이의신청을 해서 다시 조사했는데도 무혐의의 결과가 반복되면 나중에 '두 번이나 조사했는데도 결과가 바뀌지 않았네...'라는 식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위험도 있다고 했다. 물론 반대로, '피해자가 많이 억울했나 보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나의 선택만 남은 상태.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 99.9% 확실한데 이의신청을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

어찌해야 할까? 이의신청을 한다면, 나의 신경정신과 진단서와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발급 가능한 '상담사실 확인서'를 더 첨부할 수 있다. 결과를 뒤집지는 못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제일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행이다~' 혹은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을 그 가해자의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나의 어리석음, 오판이 이 결과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 많이 아프다.

또한 나의 직장 상사도 그 가해자와 관계에 있어서 더욱 거리낌 없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할 것이 뻔하여... 속이 많이 쓰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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