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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짧지식 Mar 31. 2020

삶이란 무엇인가

서양, 동양, 과학, 그리고 초월적인 관점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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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MaAxJT8hD8


1.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살아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은 무엇일까. 단순히 먹고, 숨 쉬고, 자고, 일하는 것이 살아있음일까?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이 세계는 무엇인걸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왔지만, 어쩌면 그건 당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도 물음을 가져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그 삶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 한 줄 요약 : 우리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왜 당연한 것일까? 또한 삶은 무엇일까?



2. 서양 철학에서의 삶

흔히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그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고, 다듬은 사람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많은 가르침 중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바로 '이데아론'이다. 이 이데아를 통해 플라톤이 바라본 삶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중심으로 서양 철학에서 바라본 삶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데아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설명하자면, "불완전한 현실 너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로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불완전한 현실 세계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인 이데아로.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불완전한 현실 세계와,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로 나눠서 보았다.


플라톤은 이 개념을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상상해보자. 태어날 때부터 컴컴한 동굴 속에서, 온몸이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포박으로 인해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앞만 보게 되어 있다. 이들 뒤편에는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동굴 벽에 비친 다른 이들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평생 그 그림자만이 진짜 세상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 또한,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환영일 뿐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우리의 현실 세계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환영일 뿐이다.


이 개념을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인간은 나무를 보면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벚꽃 나무이든, 소나무이든, 참나무이든, 병들어 있는 나무이든, 시들어있든, 죽어서 썩어 있는 상태든, 그 나무들이 어떻게 자랐건 간에 우리는 나무를 나무라고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 여러 나무들을 나무로 만들어 주고, 우리가 그것을 나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의 이데아다.


우리는 어떤 나무의 이데아를 통해 나무를 보기 때문에, 어떤 나무를 보든 간에 나무라고 인식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나무는 우리가 커가면서 경험하고 배우기 때문에, 아무리 형태가 다르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닌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무를 만지는 촉감은 어떨까? 우리는 공통적으로 나무를 만지면, '오돌토돌하다'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촉감은 누구도 우리에게 알려주거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나무를 만지니 촉감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물을 만질 때 느껴지는 촉감은 누구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촉감을 느낀다.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지만, 육체를 갖고 이를 망각한 상태로 지상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의 경험에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남아 있는 이데아의 기억을 떠올림으로 인해 지식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삶이란, 이데아의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의미한다. 서양에서의 삶은 플라톤을 기점으로 이원론적인 삶으로 나뉘게 된다. 현실과 이데아, 천국과 지옥, 신과 인간, 주인과 노예, 백인과 유색인 등으로.


- 한 줄 요약 : 삶이란 이데아의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현실이다.



3. 동양 철학에서의 삶

다음으로 동양 철학에서의 삶은,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 문서인 <베다>에 기초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베다>를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약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베다>이다. <구약>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되었고, <베다>는 힌두교와 불교에 뿌리가 되었다. 구약과 베다는 각각, 서양과 동양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베다를 중심으로 동양 철학에서의 삶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인도의 종교 지식 문서인 <베다>에 기초해서 동양 철학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베다는 크게 2가지 경전과 7가지 문서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는 오늘 베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따라서 베다의 부속 경전 중, 우파니샤드라는 문서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파니샤드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세계와 자아,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해 이 문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세계와 자아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하나다."이다. 현실과 이데아로 나뉘는 서양의 이원론적인 삶과 달리, "나와 세계는 하나다"라는 일원론적인 삶을 동양 철학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동양철학에서의 삶은 서양철학과 달리,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일원론적인 삶을 주장한다.


베다에서 말하는 삶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식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지금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있다. 하지만 이 옷이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마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자면 마크라는 이름이 나 자신일까? 그것도 아니다. 나는 남성이고,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집에서는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속하고 있다. 이것들도 과연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들은 나를 규정하는 요소 중 하나이지만, 본질적인 나 자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이름, 직업, 성별, 나이 등은 본질적인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체적인 것으로 가보자. 내가 만약 팔 하나가 없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다.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한다 해도, 기계 팔을 갖게 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다. 그렇다면 신체적인 몸 또한, 나를 나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전부 해체하고 나면, 결국 나에게 남는 건 단 하나뿐이다. 1인칭 관점에서 무엇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이란 특정한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능력이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전부 해체하고 나면, '의식'만이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의식을 영화에 비유해보고자 한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영사기의 빛, 필름, 그리고 스크린이다. 영사기 앞에는 필름이 있고, 그 필름을 통과한 빛이 스크린에 반사되며, 영화가 화면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영사기의 빛이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필름이 정신, 그리고 스크린이 세계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의 본질인 의식이라는 빛이, 필름이라는 정신세계를 거쳐, 스크린으로 나타날 때, 그 스크린이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영사기에서 빛이 나오지 않는다면, 스크린도 텅 빈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의식이 없으면 세계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와 세계는 하나다"라는 일원론적인 삶의 개념이 등정하게 된다. 삶이란 의식이자 세계다. 이 모든 세상은, 나의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 한 줄 요약 : 삶이란 우주(세계)이고, 우주(세계)란 삶이다.



4. 과학에서의 삶

다음으로 과학에서의 삶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과학적인 관점, 특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삶의 목적은 단 한 가지다. DNA의 생존, 이것만이 삶이자 삶의 목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한다는 것이고, 사실 우리 안에 있는 DNA가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되지만, DNA는 번식을 통해 계속해서 자기 복제를 하고,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생존한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삶의 목적은 DNA의 생존이다.


흔히 인간에게는 세 가지 강력한 욕구가 있다고 한다. 식욕, 수면욕, 성욕. 여기서 식욕과 수면욕은 생존과 연결된 것이고, 성욕은 번식과 연결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욕구 모두, DNA의 관점에서 본다면 DNA의 생존과 연결된 것이다. 번식 또한 DNA가 다른 인간의 몸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 일상생활에 모든 부분이 DNA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랑도 번식을 통한 DNA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호르몬일 뿐이라 주장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배우자로 조금 더 괜찮을 사람을 찾고 싶어 하는 것도 DNA의 생존과 연결된다. 더 좋은 유전자와 결합해, 더 좋은 DNA로써 생존하기 위함이다.


- 한 줄 요약 : 우리의 모든 욕구는 DNA의 생존과 연결돼있다. 따라서 삶은 DNA의 생존이다.



5. 초현실적인 관점에서의 삶

마지막으로 초현실적인 관점에서의 삶은,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일종의 거대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하면 쉽다. 누군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수학적으로 완벽하다. 0.00000001%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된 우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컴퓨터 기술이 100년 뒤에는 지금보다 수만 배 발전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우리 또한 미래에는 이러한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시뮬레이션을 돌릴 것이다. 아주 정교하게 그 시뮬레이션을 구축하고 돌릴 것이고, 시뮬레이션 속의 코딩된 사람들 또한 언젠간 과학발전을 이뤄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레이션을 만들 것이다.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고, 따라서 다중 우주가 공존할 것이다.


프로그램 인간은 또 다른 시뮬레이션 우주를 만들 것이고, 이 과정이 반복되며 다중 우주가 공존하게 된다.


해당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증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양자 역학이다. 양자역학은 짧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것만 알아두자.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주 작은 미시 세계의 대상들은 우리가 보는지, 보지 않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예를 들어 작은 입자인 소립자들은 평소에는 물결과 같은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측하기 시작하면 공 모양의 '입자'가 된다. 즉 우리가 무엇을 관찰하게 되면 해당 입자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다. 이는 관측에 의해 자연현상이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양자 역학이란 우리가 관찰하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작은 입자들의 형태가 변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관찰하기 전까지는 물체가 아닌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는 컴퓨터 사용량이 최적화되기 위한 환경과 같다.


쉬운 설명을 위해 게임에 비유하고자 한다. 게임에서는 우리가 움직이는 캐릭터가 새로운 장소에 갈 때, 그제야 그 장소에 있는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반대로 우리가 그곳을 발견하지 않다면, 그곳은 그냥 정지된 상태로 존재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 역학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한 이러한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 더 나아가 양자 얽힘 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뒷받침하지만, 이는 짧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개념이니 여기까지만 설명하고자 한다.


양자 역학이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는, 최근 인간이 실제로 살아있는 생물을 프로그램화했다는 점이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생물은 지렁이처럼 단순한 구조에, 몸길이가 1mm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인류는 이 생물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세포의 숫자와, 신경세포인 뉴런, 감각기관과 근육의 연결 상태까지 모두 알아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물리엔진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예쁜꼬마선충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러자 특별한 알고리즘을 입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 선충은 실제 예쁜꼬마선충처럼 움직이고 이동했다. 이는 만약 인간이 인간 구조를 100% 파악한다면, 인간 또한 프로그램으로 완벽히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간은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생명체를 프로그램으로 완벽히 구현해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우리보다 더 초월적인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 세계속의 삶일지도 모른다. 결국 삶이란 단순히 프로그램인 것이다. 해당 이론은 천재 과학자이자, 테슬라의 CEO인 엘론 머스크가 강력하게 지지하며 유명해졌다. 실제로 현재 학계에서도 이 시뮬레이션 이론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 한 줄 요약 : 우리의 삶은, 사실 시뮬레이션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삶일지도 모른다.


* 유튜브 : https://bit.ly/2XOPk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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