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청년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아버지는 공사판 ‘노가다’였다. 어렸을 땐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정말 싫었다. 일이 끝나면 대다수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왔고, 일이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집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 누나와 나는 숨죽이며 아버지 눈치를 보다가 술, 담배 시중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술 값, 담배 값이 떨어졌을 때에는 집안의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럴수록 우리는 방구석에 숨어 더욱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중학생이 되자 ‘지긋지긋한 집구석’이 싫다며 밖으로 나돌았다. 나는 누나를 욕하며, 홀로 아버지 술시중을 들었다. 나도 곧 중학생이 되자 밖으로 돌았다. 우리 세 식구가 한 지붕 밑에서 자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아버지는 공사장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며칠씩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누나는 친구네 집에서 잔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한 번씩 생활비를 주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중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친구들의 돈을 뺏기 시작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말 잘 듣고 껄렁껄렁한 친구 몇 명을 부하로 만든 다음, 돈을 빼앗아 오라고 시켰다. 몇만 원이 모이면, 친구들을 중국집에 데려가서 먹을 것을 사주었다. 남은 돈을 내 생활비로 썼다. 고등학생이 되자 몇만 원 따위가 시시해졌다. 더 큰돈을 벌고 싶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해서 PC방, 당구장, 노래방을 전전했다. 그곳에 놀러 오는 내 또래의 고등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점점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어 징집영장을 받았다. 모아둔 돈도, 아쉬워할 친구도 없던 때였다. 차라리 군대가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군대에서 2년간 열심히 총질과 삽질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제대할 때가 되었다. 제대가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중대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친누나가 전화를 걸어 급히 나를 찾았다고 했다. 중대장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누나와 통화하게 했다.
“그 인간 죽었대.” 누나는 언젠가부터 아버지를 ‘그 인간’으로 불렀다.
“공사장에서 추락했대. 점심 먹으며 반주를 많이 했던 모양이야.” 누나의 말투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몇 년간 방황을 하더니, 미용사 자격증을 따서 고향 옆 도시에서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애 아버지가 누군지 누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말년 휴가를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영정 사진으로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없어서, 어릴 적 누나와 나를 양 팔로 안으며 웃고 있던 젊은 시절 사진에서 얼굴만 확대했다. 문상객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동료 ‘노가다’들이었다. 첫날 장례식장은 새벽까지 시끌시끌했고, 점점 빈 소주병들이 늘어만 갔다. 둘째 날은 첫날에 비해 문상객이 많이 줄었다. 아파트 시공사의 현장 소장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위로금으로 장례식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고 했다. 그 대신 서명이 필요하다며 어떤 서류를 내밀었다. 장례식 비용을 대신 지불한다는 말에 나는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비뚤 하게 내 이름을 써서 건네줬다. 그 소장이란 사람은 서류를 받아 들고,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급히 떠났다. 문상객들이 뜸해진 무렵, 현장 소장 얘기를 누나에게 했더니, 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며, 나에게 노발대발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현장 소장을 다시 만나야겠다며 씩씩댔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조촐했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에 나는 부대로 복귀해 곧 제대를 했다. 제대 날에, 후임 병중에 한 명이 자기들끼리 조금씩 모았다며 흰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봉투를 군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날 나는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밤이 늦어서야 고향 집에 도착했다. 달빛에 비친 고향 집은 초라해 보였다. 어느 작은 도시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마당 딸린 일층짜리 양옥이었다. 마당은 여기저기 잡초가 무성한 흙바닥이었고, 담벼락은 낡아서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나는 대문 열쇠가 없어서, 담을 넘어야 했다. 메고 있던 가방을 담 너머로 던졌다. 어둠 속에 ‘툭’하며 땅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양손으로 담을 짚고 힘껏 솟아올라 넘은 뒤, 마당에 조용히 착지했다. 다행히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문을 여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불도 켜지 않은 방구석에 자리 잡아 멍하니 앉아 있으니,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지난 몇 년간 이 집에서 혼자 살았다. 어둡고도 고요한 밤이었다. 이 시각이면 늘 취해 있거나 곯아떨어져 있었던 아버지는 이 고요함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는 허기가 졌다. 부엌에서 수돗물을 한 컵 따라 마시고, 벌러덩 누워버렸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엔 일찍 눈이 떠졌다. 아직은 어둑어둑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내가 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눈은 반쯤 떴지만, 무엇을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날이 점점 환해지며 아버지 물건들이 보이자 할 일이 생각났다. 나는 이제는 쓸모없어진 아버지의 물건들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냉장고 문을 여니, 물 병 한 개, 소주 몇 병, 인스턴트 라면 몇 개와 김치 통이 보였다. 냉장고에 라면이 들어있는 것이 왠지 어색했으나, 아버지가 소주랑 같이 넣어둔 듯했다. 시장기가 느껴져, 나는 라면 한 개를 끓여서 소주랑 같이 먹었다. 비가 와서 일을 쉬는 날, 늦잠을 자던 아버지의 첫 끼니는 대개 라면에 소주였다. ‘씨발, 맛은 좋네,’ 라면에 김치를 한 조각 얹어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의 물건들은 조촐했다. 낡은 옷가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입기에는 작아서 전부 버려야 했다. 장롱 속에는 오래된 연장통이 있었는데, 망치며 펜치, 드라이버, 못 등이 있었다. 나중에 쓸데가 있어 보여 일단 버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의 옷, 가방, 신발들을 마당에 한데 모았다. 마당 구석에 담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삽으로 흙바닥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문득 군대에서 삽질을 하던 생각이 났다. 당시에 나는 삽질을 누구보다 잘한다고 생각했다. 구덩이가 제법 깊어졌을 때, 모아 놓은 아버지 물건들을 쏟아 넣었다. 라이터로 불을 놓았다. 천천히 타들어가는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이 점차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십 년 넘게 살았는데, 고작 남긴 것들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는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건들이 끝까지 타들어가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구덩이를 꽉 채웠던 물건들이 검은색 숯덩이가 되어 바닥으로 꺼졌다. 점심때가 되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나서며 문득 햇살이 뜨거워 눈을 찌푸렸다. 아직 9월 중순의 초가을이었다.
누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은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누나가 제대 선물이라며 사주었다. ‘전화도 받지 않을 거면서, 나한테 휴대폰은 왜 사준 거야’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지루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누나에게 갈 참으로 버스를 탔다. 누나는 옆 도시에 있는 한 대학교 안 미용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큰 대학교였는데, 같이 일하는 미용사가 서너 명 된다고 했다. 대학교는 종점 바로 전 정거장이었다. 옆 도시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로 한 번에 올 수 있었지만, 누나와 나는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군대 가기 얼마 전, 누나가 갓난애를 데리고 고향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이 미친년”하며 소리를 질렀다. 누나는 집에 오자마자 다시 애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누나를 따라 나가며, “누나 애야? 애 아버지는 어딨는데?” 하고 물었다. 누나는 “내 애다. 왜?” 하며 내 손길을 뿌리쳤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누나를 본 것이었다. 키가 큰 자기를 닮아서, 애가 또래보다 크다고 누나가 말했다. 갓난 아기 때 잠깐 본 삼촌을 기억할리 없으나, 어린 조카는 내 품에도 곧잘 안겼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조카는 방긋 웃으며 장례식장을 아장아장 걸어 다녔고, 그것을 본 문상객들은 장례식장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려했다. 나는 웃는 얼굴의 조카가 보고 싶었다.
대학교 캠퍼스는 넓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학교 안 미용실 위치를 물었다. 여러 개의 건물들을 지나 학생회관이라 불리는 건물을 찾았다. 미용실은 학생회관 안 2층에 있다고 했다.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니 문구점, 복사실이 있었고, 복도 끝에 ‘대학 미용실’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통유리로 된 미용실 앞에 다다르자, 어느 남학생의 머리를 부지런히 자르고 있는 누나가 보였다. 다른 두 명의 미용사도 각자 다른 남학생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미용실 안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다가 다시 복도를 따라 돌아 나와서, 복도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십 분쯤 지났을까, 미용실에서 누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누나가 머리를 깎던 남학생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친구와 함께 복도를 따라 걸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용실로 향하다가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
“아이 시팔, 머리 존나 못 깎네. 이게 뭐냐? 완전 아저씨 머리 같지 않냐?”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학생이 말했다.
“이 병신아, 저기서 뭘 기대하냐? 저긴 그냥 싼 맛에 가는 거지.” 다른 학생이 답했다. 나는 움직이던 발길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잠시 동안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학생회관 외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켰으나, 아직 햇볕이 따갑게 느껴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갈증이 느껴졌지만,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참았다. 잠시 뒤, 누나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눈을 뜨자마자, 나는 시내의 인력사무소에 갔다. 전에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다. 내가 왜 그토록 싫어하던 ‘노가다’를 뛸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절대 저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당분간 아무 생각 없이 몸만 쓰며 살고 싶어 졌다. 원래도 원체 별생각 없이 살긴 했지만, 몸이 힘들면 잡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을 군대에서 배웠다. 인력사무소는 집에서부터 걸어가면 20분 정도 걸리는 시내의 오래된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아침 5시 30분쯤 도착해 사무소의 철문을 힘주어 밀자, ‘삐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작은 사무실 안에는 책상 두 개와 벽 옆쪽으로 의자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남자 둘이 나를 쳐다봤다. 그 둘은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책상 위에 뜨거운 김이 나는 차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맞은편 책상에도 누군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 내 뒤에서 익숙한 ‘삐꺽’ 소리가 들렸다.
“일 구하러들 오셨죠?” 소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큼지막한 안경을 쓰고, 머리가 벗어진 소장은 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네, 저는 오늘 처음 왔는데요.” 내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가만 보자, 오늘 처음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소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거 작성하시고, 신분증 있으면 줘 봐요. 그럼 안전교육도 안 받았지?” 소장은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나에게 펜과 함께 건네었다. 받아 들어 보니, 소개요금 대리수령 동의서라고 적혀 있었다. 소개요금으로 일당의 십 퍼센트를 인력사무소에서 가져간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동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사이, 소장은 내 신분증을 보며 어딘가에 무엇을 적고 있었다.
“너, 천수동 김 씨 아들 아니냐? 가만 보니, 아버지를 많이 닮았네. 맞지?” 소장은 적던 손을 멈추고, 안경 위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맞는데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일은 참 안됐어. 그 양반, 술 좋아하는 것만 빼면 일도 잘하고 좋았는데. 참, 아버지 장례식 때는 못 가봐서 미안하게 됐다. 여기 일이 워낙 바빠서.” 소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려, 김 씨랑 많이 닮긴 닮았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전교육증 없으면 할 일이 많이 없어. 나중에 시간 날 때, 안전교육받은 다음에 안전교육 카드 받아가지고 와라. 그리고 안전화도 있어야 한다. 오늘처럼 그냥 운동화 신고 작업했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다. 어디 보자, 오늘 이삿짐 나르는 일이 있는데, 넌 거기 가야겠다. 힘도 잘 쓰게 생겼네.” 소장은 장부에 뭔가를 적으며 말했다.
“소개비 만원 일단 내고, 이따가 요 앞에 사람 데리러 오면 차 타고 가면 돼. 일당은 일 끝나고 9 만원 줄 거야.” 소장이 건물 밖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아직 일도 안 했는데, 소개비부터 떼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9 만원의 십 퍼센트는 9 천 원인데.’ 하는 생각도 순간 했지만, 그냥 만원을 건넸다. 소장은 돈을 받아, 서랍에 넣었다. 6시가 가까워지자, 인력사무소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사무소 밖으로 나와서 상가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6시가 넘어가자, 상가 입구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곧 승합차가 한 대 도착하더니, 운전자가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 타라고 했다. 나까지 총 네 명이 차에 탔다. 20분 남짓 차를 타고, 내린 곳은 시 외곽에 위치한 한 이삿짐센터였다.
“자, 거기 두 명은 나랑 이 차 타고 출발하고, 나머지 두 명은 저기 저 차 타고 사장님하고 같이 출발해요. 빨리 움직여요.” 우리 앞에 세워져 있던 이삿짐 트럭의 운전석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리며, 나와 내 옆의 아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의 아저씨는 50대가 훨씬 넘어 보였으나, 정확한 나이는 가름하기 어려웠다. 키는 작달막했지만, 몸은 단단해 보였다. 직원인 남자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얼핏 40대 중반으로 보였다. 이삿짐을 오래 날라서인지 어깨가 탄탄해 보였으나, 그 아래로는 배가 약간 나와 보였다. 남자는 트럭에서 ‘OO익스프레스’와 그 아래 연락처가 적힌 파란색 조끼를 꺼내어 나와 옆에 있던 아저씨에게 주었다.
“이거 걸치고 트럭에 타세요.” 나와 아저씨가 옷을 걸치고 트럭에 올라타자, 남자도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오늘 오전에 한 건, 오후에 한 건 있어요.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제시간에 일을 다 못 끝냅니다.” 남자가 우리 쪽으로 흘끗 눈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내의 한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이사를 하는 집은 8층에 위치한 어느 신혼부부의 집이었다. 옆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가는지라 이동거리는 가까웠지만, 여자가 만삭의 몸이라 포장이사를 불렀다고 한다. 이삿짐센터 사람은 능숙한 솜씨로 짐을 싸기 시작하며, 우리에게 이리저리 지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상자와 바스켓에 물건들을 담기 시작했다. 다 담은 상자와 바스켓은 현관 쪽으로 몰아 놓았다. 작은 물건들의 정리가 끝날 무렵, 이삿짐센터 직원인 남자가 냉장고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천으로 솜씨 좋게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손을 거들었다. 나와 아저씨에게 세탁기와 에어컨을 같은 식으로 싸라며 길 다란 천을 주었다. 그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여기 OO아파트 103동 808호인데, 사다리차 여기로 얼른 와야겠는데? 얼마나 걸려?” 남자가 다급한 듯 말했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와” 남자가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왔다.
“여기 엘리베이터가 작아서 냉장고가 안 들어가요. 할 수 없이 베란다 창문을 떼어내고 사다리차 통해서 그쪽으로 나가야 해요. 냉장고 뺄 때, 흠집 안 나게 힘줘서 잘 들어야 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남자는 베란다로 가서 창들을 전부 떼어냈다. 나는 베란다 창들을 받아서 거실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얼마 뒤, 사다리차가 도착했다는 전화에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곧 사다리차 기사가 808호 베란다 쪽으로 사다리를 맞춰서 올리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베란다의 창틀에 낡은 이불을 걸쳐놓았다. 만에 하나 창틀에 냉장고가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함 같았다. 남자는 냉장고 옆에서 허리를 굽히고, 냉장고를 서서히 등으로 기울여 온전히 받쳤다. 남자와 반대편의 아저씨가 동시에 힘을 주어 슬며시 냉장고를 들어 올린 사이, 나는 밑으로 바퀴 달린 구름판을 넣었다. 냉장고를 베란다 쪽으로 밀어서 옮긴 뒤, 같은 방식으로 구름판을 빼냈다. 그 후 셋이서 힘을 합쳐 냉장고를 베란다 바깥에 위치한 사다리차에 실었다. 처음 해보는 진땀 나는 작업이었다. 냉장고를 실은 사다리차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 사다리차에서 냉장고를 내려서 이삿짐 트럭에 실었다. 그다음은 세탁기, 에어컨 순으로 날랐다.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겁다는 생각보다 더 두려웠다. 덩치가 큰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다 빠지자, 우리는 현관에 쌓아놓은 짐들을 하나하나 사다리차로 나르기 시작했다. 집안이 점점 텅 비어갔고, 처음엔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직원인 남자는 나에게 먼지들을 쓸어 담으라고 했다. 청소를 마친 내가 지상으로 내려갔을 때, 남자는 이삿짐 트럭에 시동을 켜고 있었다.
“어서 타요.” 나를 본 남자가 말했다. 나는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은 바로 옆 아파트 단지로 갔다. 사다리차는 벌써 와서 이사 갈 집의 베란다에 사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아까와 반대로 사다리를 통해 짐을 올렸다. 집주인 부부의 지시에 맞춰서 가구를 옮겨서 배치하고, 짐을 풀었다. 낮 12시가 다되어 이사를 마쳤다. 아침에 비해 기온은 많이 올라있었고, 그제야 땀 때문에 옷이 많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서 점심 먹고 다른 데로 가시죠.” 직원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백반 집으로 가서 김치찌개를 시켰다.
“다음 집은 짐이 더 많을지 몰라요. 그 집은 이 집보다 평수가 조금 더 되거든요.” 남자가 김치찌개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담으며 말했다. 뜨거운 국물 덕분에 땀은 더 났고, 차가운 물을 두어 잔 들이켰다. 아저씨와 나는 밥공기를 한 개 더 시켜먹었다. 계산은 남자가 했다. 밥을 다 먹고 30분쯤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 역시 아파트였는데, 과연 더 넓은 만큼 짐이 더 많았다. 4인 가족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전에 배운 대로 짐을 싸고 나르고, 다시 나르고 풀었다. 오후 5시가 다되어서 이사가 끝이 났다. 나는 숨이 가빴고, 손에 힘이 풀렸고, 옷은 많이 젖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트럭을 타고 이삿짐센터로 돌아왔다. 직원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봉투를 2개 들고 나왔다.
“여기 오늘 일당이요. 수고했어요.”라고 말하며 아저씨와 나에게 봉투를 건네었다. 나는 받자마자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지만, 아저씨는 봉투에서 돈을 꺼내어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만원 지폐 몇 장이 보였다.
“8 만원 밖에 없구먼. 인력사무소에서는 9만 원이라고 했는데?” 아저씨가 직원 남자에게 물었다.
“아까 점심 값 제한 거예요.” 직원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점심 값은 7 천 원이었어, 이 새끼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도 우리랑 일하고 싶으면 그냥 가세요.” 직원 남자가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 말에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돌아서는 아저씨를 보며 나도 같이 돌아섰다.
“자넨, 시내 쪽으로 다시 가나? 같이 버스 타지.” 아저씨가 겸연쩍어하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같이 시내로 돌아와 인력사무소 근처에서 헤어졌다. 나는 시내에 예전부터 자주 가던 중국집에 들러 자장면 곱빼기를 주문해 먹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대문을 잠가 놓고 나가는 바람에 다시 담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담을 넘는 데 성공했다. 현관문을 밀쳐 열고 거실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 잠귀에 빗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조차 귀찮았다. 그 귀찮음도 잠 속으로 곧 사라져 버렸다.
몇 시간이 더 지났을까, 갑자기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려고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절로 ‘끄응’ 소리를 내며, 거실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벽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인력사무소로 다시 갈까 망설였는데, 밖에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고 이내 마음을 접었다. 먼지와 땀에 젖은 옷으로 잠든 까닭에 몸이 끈적끈적하고, 기분이 불쾌했다. 순간 옷도 빨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겹쳤다. 나는 내리는 비를 흘끗 쳐다보고는, 맨발로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았다. 9월의 아침 비는 차가웠으나, 땀에 흠뻑 베인 옷과 몸을 씻기기에는 아직 버틸만한 온도였다.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듯, 주변은 아직 어둑어둑했고 빗소리만 가득했다. 한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나는 옷을 몽땅 벗었다. 벗은 옷은 마당을 가로질러 걸려 있는 빨래 줄에 널어놓았다. 알몸인 채로 비를 더 맞은 뒤,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가 수건을 찾아 젖은 몸을 말렸다. 다시 알몸인 채로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몇 시간이 더 흘렀을 것이다.
나는 시장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이미 비는 그친 듯, 밝은 빛이 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옷장에서 옷을 주섬주섬 꺼내어 입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병을 꺼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라면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젓가락질 몇 번에 금세 면발이 다 없어졌다. 국물까지 시원하게 다 들이켰다. 나는 라면을 다 먹자마자 설거지까지 마친 뒤, 환기도 시킬 겸 현관문을 열어 두었다. 현관문 밖으로 보이는 빨래 줄에 걸린 옷들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어제 받은 봉투가 생각났다.
“에이 씨발, 다 젖었네.” 빨래 줄에 걸린 바지의 주머니에서 젖은 봉투를 꺼내며 나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젖은 봉투에서 조심스레 지폐를 꺼내어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젖은 돈들을 다 펼쳐놓다 보니, 갑자기 엊그제 태운 아버지 옷가지들 생각이 났다. 마당에 옷가지를 태우려 파놓은 구덩이는 아침에 내린 비로 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웅덩이의 물은 옷을 태운 재가 섞여 흙탕물보다 더 검은색이었다.
“씨발, 깊이도 팠네.” 나는 자책하며 말했다.
나는 웅덩이 밑으로 팔을 쑥 넣어 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돌멩이 몇 개가 손에 걸려서 집어냈다. 다시 팔을 넣어 웅덩이 밑을 뒤적거렸다. 이번엔 뭔가가 금속성 물질이 잡히는 것 같았다. 열쇠 몇 개가 달린 열쇠고리였다. 현관문과 대문 열쇠였다. 진흙이 묻은 열쇠를 웅덩이 물에 씻은 뒤, 널어놓은 지폐들 옆에 놓았다. 열쇠들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저 열쇠 덕분에 이제 이 집 담을 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오후가 되어, 회색 구름이 조금씩 걷히자,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들 사이로 햇빛이 마당으로 떨어졌다. 빨래 줄에 걸린 옷들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의 잦아들었다. 평화로운 오후라 할만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분식집으로 가서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사 먹었다. 젖은 돈을 내밀자, 주인아줌마는 “다 젖었네.”라고 말하며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과 물, 맥주를 사고 다시 젖은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은 편의점 알바는 군말 없이 거스름돈을 주었다.
대문을 열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웅덩이의 물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마당으로 나와 삽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웅덩이를 더 넓고 깊게 파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흙탕물이 튀었다. 폭과 깊이가 약 1 미터쯤 되었을 때, 쌓아둔 흙으로 웅덩이 가장자리를 따라 둔덕을 만들었다. 물은 많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가지런한 원형의 둔덕은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서 확장된 웅덩이에 물을 가득 채웠다. 옷이 다시 땀과 흙탕물에 젖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먹 크기만 한 돌들을 주워 왔다. 제법 모이자, 웅덩이의 둔덕의 원형을 따라 위에 일렬로 돌을 놓았다. 다 완성하고 나서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 볼만 하네.’라고 속으로 말했다. 순간 가슴팍으로 바람이 들어와, 맺혀있던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나는 며칠 동안 새벽마다 인력사무소로 나갔다. 어떤 날은 공장에 가서 물건들을 나르거나 자재들을 정리했고, 어떤 날은 철거 현장에서 나오는 벽돌들을 날랐다. 무슨 일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9월 말이 되었는데도, 낮 시간에 이렇게 더운 지는 군대에서도 몰랐다. 나는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된 꼬락서니로, 녹초가 돼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오면 웅덩이에 줄어든 물을 채워 넣었다. 잡초가 무성한 우리 집 흙 마당 한가운데에 웅덩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쩌다 생긴 이 웅덩이가 좋아졌다. 그럴수록 주변에 있는 잡초들도 웅덩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됐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웅덩이 앞에 갖다 놓은 의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것이 어느덧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해는 생각보다 천천히 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에 나는 느긋해졌다.
오늘은 인력사무소에 처음으로 갔던 날 같이 일했던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마트에 들러서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그 직원 생각이 났다.
‘그 개새끼, 다음에도 점심 값으로 더 챙겨 먹으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 다다랐을 때, 대문 앞에 누나가 보였다. 누나는 양손으로 자고 있는 조카를 안고 있었다.
“누나가 웬일이야?” 나는 속으로는 반가웠지만 속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
“너 모레가 추석인 건 알고 있지?” 누나가 답했다.
“그동안 추석 때 집에 안온 게 누구였는데? 동생이 제대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나는 이렇게 받아치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었다.
“나도 오랜만에 차례 좀 지내보려고. 우리 상훈이에게도 외갓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엄마 체면이 좀 서지.” 누나가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이제야 조금 철이 드나?” 나는 열쇠고리에서 현관문 열쇠로 바꿔 쥐며 말했다. 뒤이어 들려온 누나의 말 때문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야, 저게 뭐야? 연못이야?” 누나가 잡초 사이에 있는 웅덩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웅덩이 말고 ‘연못’이라는 단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응. 그냥 어쩌다가 만들었어.” 나는 대답했다.
“너는 다 쓰러져가는 이 집에 연못이 가당키나 하니? 웬 낭만이셔?” 누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순간 안고 있던 조카가 깨어났다. 내가 귀여운 마음에 조카 얼굴에 손을 가져대려고 하니, 나를 피하며 엄마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상훈아, 저것 봐라. 외삼촌이 상훈이 보여주려고 연못까지 만들었네. 예쁘지?” 누나는 어린 조카를 연못 앞까지 데려갔다.
“이왕 만들 것이었으면 더 크게 만들지. 좀 작다.” 누나가 말했다.
“차례는 어떻게 지내려고? 음식도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대뜸 물었다.
“내일 장도 보고 음식도 만들어야지 뭐. 나 무시하지 마라. 나 그런 거 되게 잘해.” 누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은 참 운도 좋아.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차례 상 받아먹을 때가 되고. 저승에서 아주 배가 터지겠어.” 누나가 상훈이를 연못 앞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우리 남매는 그 자리에 서서 해가 질 때까지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해 질 녘 마지막 빛 자락이 우리를 지나 연못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끝-
첫 문장의 '노가다'라는 말 때문에 소설 제목인 '못'을 '못박다'할 때의 못으로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연못의 '못'입니다.
동음이의어이지만 상반된 이미지를 갖는 두 개의 ‘못’을 이용해 쓴 소설입니다.
‘못’은 날카롭고 상처를 주는 이미지를 갖지만, 연못의 ‘못’은 평화롭고 위안을 주는 이미지입니다.
전자의 ‘못’에 의해 상처를 받지만, 후자의 ‘못’에 의해 위안을 얻는다는 기본 설정을 토대로 스토리를 전개했습니다.
전자의 ‘못’을 직접 등장시키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그리고 돈을 떼어먹는 세상 사람들을 전자의 ‘못’처럼 그렸습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연못)을 만들어가며 세상 살이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을 소설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