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도 –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열심히 살아도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재래시장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일했다. 고향의 재래시장은 나와 남동생의 어린이집이자 놀이터였고 밥 먹는 곳이었다. 그때는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많아서 동생은 주로 남자아이들과 숨바꼭질이나 사방치기를 했고, 나는 여자아이들과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주로 한복집 앞에서 놀았는데 어린아이들이 보더라도 그 근처가 깔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생선 가게 근처는 비린내 때문에 싫었고, 무엇보다 바닥이 젖어 있어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분식이나 족발 같은 먹거리를 파는 가게는 먼지 날린다고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한복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주인아줌마가 밖으로 나와서 다른 데서 놀면 사탕을 한 개씩 준다고 할 때까지 놀이는 계속되었다. 누룽지맛 사탕을 한 개씩 받은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시장 어딘가에 있는 각자의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는 식당 주인아줌마와 함께 음식을 만들거나 서빙을 했다. 가끔 시장 안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음식이 가득 담긴 큰 쟁반을 머리에 이고 배달을 가기도 했다. 배달을 오가는 엄마를 마주칠 때면 엄마는 방긋 웃으며 붕어빵이나 꽈배기를 사서 나와 동생에게 주었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함께 놀던 친구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곤 했다. 나도 시장 사람들을 닮아 인심이 후해졌나 보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엄마가 일하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주인아줌마는 나와 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주인아줌마에게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딸과 서너살 많은 딸이 있었다. 우리는 주방보다 더 안에 있는, 그러니까 세 모녀가 생활하는 방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 안 테이블에서는 아저씨들이 반주를 마시기 때문에 아이들이 식사하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거의 매일 저녁식사를 같이 했지만, 큰언니는 나를 어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는지 시큰둥했지만, 작은언니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주로 초등학생인 작은언니가 곧 같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에게 학교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이미 고등학생인 자신의 언니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 상대로 나를 선택한 것이리라. 엄마 일이 끝나는 9시쯤 동생과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시내를 관통해서 흐르는 강이 있는데, 가로등도 없는 오래된 다리 위에서 고개를 들고 시커먼 밤하늘 속에서 별들을 찾곤 했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전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느라 한 달에 몇 번밖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나와 동생에게 집 보러 가고 싶으면 얼른 옷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나는 신나서 냉큼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엄마와 아빠는 먼저 동네 부동산에 가서 사장님을 만나더니 마을 어귀에 새로 지은 빌라로 향했다. 사장님이 앞장서서 들어갔고, 그다음에 엄마와 아빠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나와 동생은 쭈뼛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먼저 새집 냄새가 진동했다. 그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온통 새하얀 벽지였다. 나와 동생의 낙서로 가득하고 손때묻은 우리집 벽지를 떠올리며 본래 벽지라는 것이 이렇게 깔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방, 거실, 화장실을 모두 둘러보고 나는 우선 방이 3개라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방 2개짜리 집에서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자고, 어쩌다 아빠가 오면 같이 쓰기는 했지만, 동생만 방을 따로 쓰게 되었다. 가슴이 점점 봉긋해지고 생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제 내 방이 생긴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집에 돌아와 아빠가 나에게 본 집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무조건 이사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나의 들뜬 마음을 알아차리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의 재정 상태에 대해서 잘 몰랐으므로 당연히 지금과 같은 전세로 간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빌라로 이사하기 며칠 전에야 나는 엄마와 아빠가 그 집을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집으로 이사하던 날, 새집 냄새가 마치 향수 향기라도 되는 양 킁킁거리며 맡았던 기억이 난다.
그 빌라를 사느라 부모님은 빚을 낸 것 같았다. 멀리까지 일을 나간 아빠는 새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엄마는 식당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면 부업으로 마늘을 깠다. 마을 어귀에 누군가 트럭으로 마늘을 잔뜩 싣고 오면 동네 아줌마들이 몇 포대씩 들고 간다. 엄마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늘을 물에 불리더니 작은 과도 하나를 들고 까고 또 까고, TV를 보면서도, 졸면서도 계속 깠다. 내가 도와주려고 하면 방에서 공부나 하라고 했다. 아무리 환기해도 온 집안이 마늘 냄새로 가득했다. 마늘 냄새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새집 냄새마저 잊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 일은 나와 연년생인 남동생이 중학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엄마는 밤새 마늘을 까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식당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두 자식의 저녁까지 먹이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당시엔 미처 하지 못했다. 엄마가 주인아줌마와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고, 나와 식당집 작은언니도 그랬다. 고등학생이 된 언니는 야간 자율학습을 한다며 밥만 후딱 먹고 다시 학교로 가곤 했다. 그 집 큰언니는 서울 어느 큰 미용실에서 일하며 미용 기술을 배운다고 하는데, 못 본 지 꽤 됐다. 나와 동생은 저녁을 먹고 학원에 가거나, 안 가는 날엔 엄마를 기다렸다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엄마는 마늘 포대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다가 미끄러졌다. 머리와 목을 계단 모서리에 부딪쳐 정신을 잃고 있던 엄마를 이웃집 아줌마가 발견하고 신고했다. 그 아줌마도 마늘을 까는 터라 마늘 포대의 무게가 얼마인지 잘 알고 있었다.
“넘어지면 그걸 놓아야지, 잡고 있으면 어떡해. 글쎄, 그 무거운 거에 깔린 거야.”
넘어진 엄마를 탓하는 건지, 마늘 포대의 무게를 탓하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병원에서 고열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깨어난 엄마는 사지마비 판정을 받았다. 나는 엄마가 계단에서 고작 넘어졌을 뿐인데 앞으로 평생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아빠와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있던 처음 며칠 동안은 마치 금방이라도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설 사람처럼 엄마를 대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바뀐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야 했던 내가 제일 처음 알게 되었다. 절대로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고. 겨울 방학이 끝나면 나와 동생은 학교에 다시 나가야 했고 아빠는 돈을 벌어야 했다. 간병인이 필요하지만 그럴 돈이 없으니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도, 외할머니도, 남은 가족 모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엄마가 외갓집으로 이송되기 전날, 식당 주인아줌마가 병문안을 왔다. 잠시 식당 문을 닫고 왔다며 환하게 웃었지만,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엄마와 아줌마는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던 중, 엄마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힘겹게 신음을 내뱉자 병실 안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아줌마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할까 말까 망설였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어렵게 꺼내었다.
“언니, 우리 애들 밥 좀...”
엄마는 입술을 떨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라.”
아줌마는 손으로 두 눈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줌마는 병실을 나가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같이 병실 밖으로 나온 나에게 아줌마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네 엄마한테 못 준 월급이고, 나머지는 내가 좀 더 넣었다.”
나는 아줌마가 건넨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네 엄마 저렇게 됐어도, 너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다. 너랑 네 동생한테 밥 먹인 세월이 얼만데. 앞으로도 계속 동생 데리고 밥 먹으러 와. 맛있게 차려줄게.”
나는 봉투를 든 채 “네” 하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줌마가 돌아간 후, 나는 화장실로 가서 몰래 봉투를 열어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 있어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 아빠가 병원에 왔을 때 나는 아줌마에게 받았다고 말하며 봉투를 건넸다.
엄마가 외할머니댁으로 가고 나자, 아빠는 동생과 나를 앉혀놓고 우리 집을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을 살 때 빚을 졌는데, 엄마 병원비 때문에 또 빚을 져서 아빠 혼자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우리가 살 때보다 높은 값에 팔 수 있다고 한다. 그 돈을 잘 굴려서 나중에 아파트로 가자고, 하지만 당장은 좀 좁은 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아빠는 엄마가 장애인이 되어서 아파트 청약에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몇 달 뒤에 우리는 다시 방 2개짜리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일하던 식당에 자주 갔다. 때로는 혼자 가기도 하고, 동생과 같이 가기도 했다. 주인아줌마는 정성껏 찌개백반을 차려주셨다. 손님이 없을 땐 아줌마와 같이 먹기도 했다. 아줌마는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는 외할머니댁에서 전혀 거동을 못 한 채 누워만 지내고 있었다. 아줌마는 언제 같이 가서 만나자고 얘기하지만, 식당 일이 바빠서 성사된 적은 없었다. 아줌마는 엄마 일을 대신할 다른 아줌마를 고용했다. 엄마보다, 주인아줌마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줌마다. 이제 주인아줌마가 그 사람을 언니라고 부른다. 요즘엔 젊은 사람들은 식당 일을 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식당집 작은언니는 대학 입시를 치뤘다. 하지만 지원한 대학에서 모두 낙방했다고 한다. 아줌마는 언니에게 품은 불만을 나에게 토로했다.
“그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남고 새끼들이랑 어울려 다니더니 다 떨어졌어. 어째, 큰딸이나 작은딸이나 다 똑같냐.”
나는 숨죽이며 밥을 먹고 있는 언니에게 슬며시 물었다.
“언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얘기를 아줌마가 듣고는, 언니 대신 답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이제 이 식당에서 평생 일해야지.”
언니는 잡고 있던 숟가락을 밥상에 던지고는 울면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누가 여기서 일한대? 엄마나 실컷 해.”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에 숟가락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봄이 되자 작은언니는 큰언니 밑에서 미용 기술을 배우겠다며 서울로 올라갔다.
여고 입학식 날, 나는 동생과 함께 인사도 드릴 겸 아줌마네 식당에 갔다. 마침 장날이기도 해서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시장 분위기와 달리 식당 안은 한산했다. 아줌마는 동생과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는 구석에 작은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좀만 기다려. 부대찌개 해줄게.”
잠시 후, 아줌마가 큰 쟁반에 가득하게 찌개와 밥, 반찬을 들고 왔다. 동생이 벌떡 일어나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줌마는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고 주방으로 갔다. 나는 휴대용 가스버너를 켜고 부대찌개를 끓였다. 전에도 많이 먹어봐서 그 맛을 잘 알지만 오랜만이라 군침이 돌았다. 찌개가 다 끓자 동생은 국자로 퍼서 그릇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동작을 멈추더니 그릇 안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게 뭐야?”
하고 말하며 젓가락으로 뭔가를 들었다. 그건 누군가 한입 베어 물은 햄 조각이었다.
“누가 먹던 거잖아.”
동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눈을 치켜뜬 채, 검지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다. 슬며시 주방을 보니 엄마 대신 일하던 아줌마는 보이지 않고 주인아줌마 혼자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뉴스에서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식당 운영도 힘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엄마가 병원에서 아줌마에게 부탁했던 말이 생각났다. 옛정에 기대어 아줌마에게 나와 동생의 공짜 식사를 부탁해야만 했을 때 엄마는 부끄러움을 무릅써야 했을 것이다. 나는 아줌마가 먹다 만 음식을 내어온 이유가, 군식구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푸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우리를 먹여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엄마도, 아줌마도,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열심히 살아도 한 번쯤은 자존심을 접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에이, 더럽게 그걸 왜 먹어?”
나는 그릇에 놓인 먹다 만 햄 조각을 재빨리 집어 먹었다.
“뭐, 어때? 한번 끓인 건데.”
나는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지만, 동생은 주방 쪽을 보며 눈을 흘겼다.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근교로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는 예전에 엄마가 차려주던 음식들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엄마의 손맛과 똑같은 그 음식들을, 아줌마 덕분에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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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서울 근처 신도시로 이사를 결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허리 부상을 당한 아빠가 더 이상 공사 현장에서 몸을 써서 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대도시에서 대리운전과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려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연로한 외할머니께 엄마의 간병을 계속 맡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와 동생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우리가 아빠와 함께 지내며 어떻게든 엄마를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장애인 특별공급으로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서 이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되었다. 아빠는 다시 큰 빚을 졌지만, 온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뻤다. 나와 동생은 대학 진학을 미루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생은 입대 전까지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결혼식장에서 일했다.
예식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뷔페식당에서 빈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을 닦는 것이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면 손님들이 몰려와 끊임없이 테이블이 채워지고, 빈 접시는 쌓여갔다. 어느 날, 분주한 식당 안에서 수십 개의 접시를 나르던 중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 무더기가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깨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순간 식당이 조용해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곧장 빗자루를 들고 조각들을 신속하게 치웠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손님들도 곧 다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날 매니저에게 불려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고, 깨진 접시값은 급여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예식이 없는 평일에도 돌잔치나 회갑연 같은 행사가 이어졌다. 내가 낮에 일하는 동안 아빠가 엄마를 돌보고 밤에는 그 반대인 나날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식당을 벗어나 예식장 내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맡은 역할은 신부의 드레스 자락을 들고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웨딩드레스는 보기엔 우아했지만, 실제로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신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드레스가 이리저리 흔들려 밟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어느 날은 신랑이 유난히 긴장한 듯 보였다. 그는 마이크를 잡은 채 손을 덜덜 떨며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깊게 들이쉬세요"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그는 예식 도중에 토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재빨리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바닥을 덮고, 손수건으로 신랑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코끝을 스치는 건 전날 마신 술 냄새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내가 언니, 오빠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어느새 나를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가끔씩 내 또래의 여자가 '신부 입장'을 하는 날이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전무님이 나를 불렀다.
"우리 예식장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됐지?"
그는 정직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직 40대인 전무님은 예식장 주인의 아들로, 실질적으로 사장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순간 마음이 두근거렸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이곳에서 정직원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였다. 나는 날아갈 듯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직원이 되고 나서 맡은 일은 아르바이트생들을 관리하고 업무를 배분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내가 정직원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토바이는 크게 파손됐고, 아빠는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어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했다. 깁스를 한 채 엄마를 돌보는 아빠를 보며, 나는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동생은 군복무 중이었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은 이제 나뿐이었다. 매달 빠져나가는 대출금과 생활비는 내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예기치 않은 지출이 생기면 겁부터 났다. 나는 더 많은 근무를 자청했고, 쉬는 날에도 일할 기회를 찾아 나섰다. 그즈음부터 예식장의 반짝이는 불빛 아래, 신랑과 신부가 입장할 때마다 그 순간을 더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무렵, 내가 일하는 예식장에서 우연히 식당 집 큰언니를 만났다. 너무 오랜만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짙은 화장을 하고 하늘하늘한 롱스커트를 입은 언니는 유니폼을 입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에 패용한 내 명찰을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어머나, 이게 얼마 만이니? 너 여기서 일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다. 여기 상담실장님 좀 만나볼 수 있을까?”
“언니, 결혼하세요?”
나는 놀람과 축하하는 마음이 뒤섞인 채 되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우리 미용실 홍보 좀 하려고.”
언니는 작은언니와 함께 이 근방에 미용실을 새로 열었다고 했다. 예식장을 통해 신랑, 신부나 혼주의 메이크업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 싶어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전무님의 아내인 예약실장님이 결혼 상담을 맡고 있다고 알려드리며 예약실로 언니를 안내했다.
그날 저녁, 나는 퇴근 후에 개업한 언니네 미용실에 들렀다.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인테리어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우리 예식장의 신부대기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드러운 조명이 천장 모서리마다 은은하게 퍼지며 거울에 반사되어 공간을 한층 더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커튼을 살며시 걷고 개별 메이크업룸으로 들어서자, 거울 가장자리를 따라 촘촘히 박힌 전구들이 부드러운 빛을 발하며 눈길을 끌었다. 정돈된 화장대 위에는 다양한 크기와 색감의 화장품, 브러쉬, 퍼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벨벳 소파와 우드 톤의 가구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공기에는 은은한 파우더 향이 스며들어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작은언니와 나는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타향살이의 고단함, 미용업과 웨딩업에서 겪었던 힘든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문득 아줌마의 안부를 물었을 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셔. 폐암 말기야.”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아줌마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바쁘게 식당을 지키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언니의 말을 곱씹으며 엄마를 떠올렸다. 점점 생의 기운을 잃어가며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 아줌마의 소식을 전하면, 엄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언제 우리 엄마 병문안 한 번 안 갈래? 너 보면 좋아하실 거야."
나는 순간 목이 메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약속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 대신 나와 동생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던 아줌마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너무 늦기 전에, 아줌마의 손을 꼭 한번 잡아드리고 싶었다.
예전에 아줌마가 엄마 병문안을 왔을 때 받았던 봉투가 생각났다. 나는 화장실에서 몰래 세어봤던 봉투 안 금액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돈을 돌려드려야 했다. 아줌마 덕분에, 아줌마의 사소한 친절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줌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형편에서 그 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식장 정직원이 된 이후, 아르바이트생들이 가불을 요청할 때마다 나는 내 돈으로 해결했다. 그들 중 일부는 돈을 갚지 않은 채 그만두는 경우가 있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가불을 해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집적 가불을 요청하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존심을 접기로 했다.
나는 전무님을 찾아가서 정중히 월급을 가불해달라고 요청했다. 전무님은 처음 겪는 일에 의아한 눈빛을 보였지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이유를 말하자 곧 조용히 수긍했다. 그렇게 가불받은 돈을 가지고, 언니와 함께 아줌마 병문안을 갔다.
병실은 희끄무레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고요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잿빛 하늘 아래,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커튼이 반쯤 가려진 병상 너머로는 얇은 담요가 덮인 아줌마가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뵌 아줌마의 얼굴은 홀쭉하고 창백했다. 눈은 감긴 채 깊이 잠든듯했지만, 마취약에 취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느다란 코줄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때 바삐 움직이며 밥상을 차리던 손이 이제는 힘없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병상 곁에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한층 더 수척해 보였다. 눈가의 가는 주름들이 엷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입술은 말라 보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울면 안 됐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이제 몇 달 안 남았대.”
작은언니가 작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줌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니도 말을 아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줌마 머리맡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나는 더 이상 병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병실을 나와 복도 끝에서 조용히 울었다. 소리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깨가 계속 떨렸다.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병실 문 앞에서 봉투를 든 작은언니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바닥에 희미한 눈물 자국이 남았다. 작은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은, 돌아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언니에게서 아줌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엄마가 폐렴이 악화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끝내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우리 집 형편은 동생이 제대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동생은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모두 모아 내놓았고, 아빠도 깁스를 풀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요즘 예약실에서 일하며 예비 신랑·신부들에게 웨딩홀과 식당을 안내하고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니네 미용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한다. 언니는 내가 결혼하면 지상 최고의 신부 화장을 해주겠다고 벌써부터 들떠 있다.
아줌마와 엄마가 모두 떠났지만,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빚을 진 듯한 기분이 남아 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쉽게 해소되지 않을 무언가가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인생은, 그게 무엇인지 찾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