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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시간의 충돌

남은 수명을 주고 받는다는 미신과 운명에 얽힌 한 남자의 충동적 이야기

by 우유좋아

-오빠, 오빠는 운명을 믿어?

-뜬금없이 웬 운명?

-난 이따금씩 말이야, 어떤 운명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을 해.

-어떤 운명?

-이를테면, 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시계가 내 머리 위에 달리는 거야.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시계가 달려있는 거지. 오빠 머리 위에도.

-내 머리 위에도?

-응, 사람마다 시계에 적힌 숫자가 다 달라서, 제각기 정해진 시간대로 살다가 ‘타임아웃’이 되면 그때 죽는 거야. 마치 시한폭탄처럼.

-그 시계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 궁금해하니까.

-시계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계에 적힌 숫자가 바뀔 때가 있어.

-어떻게?

-간혹 같은 날에 죽었다는 노부부 얘기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지? 그 둘은 본래 각자의 시계대로 살다가 서로 만나는 순간, ‘시간의 충돌’이 일어난 거야.

-시간의 충돌?

-응, 시간의 충돌이 일어나면 각자가 가진 시간을 상대방에게 주거나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수 있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서로의 시계가 같아져 버린 거야. 더 이상 주고받는 것이 무의미한 영역에 다다른 거지.

-그럼 모든 부부가 한날한시에 죽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시간의 충돌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만약 충돌이 일어난다고 해도, 금세 분리되고 말아서 서로 주고받는 시간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그럼 시간의 충돌은 언제 일어나는데?

-서로 운명적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우리는 시간의 충돌이 발생했을까?

-그건 몰라. 그런 건 항상 나중에 가봐야 아는 거니까.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10월의 이른 아침, 파란색과 회색을 적당히 섞어 놓은 것 같은 하늘이 높게만 보였다. 금방이라도 파란색이 회색을 온전히 몰아낼 기세로 점점 주변이 밝아졌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 단지 입구로 출근하는 차들이 이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입구 앞에 한 남자가 먼 하늘을 보며 서있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살집이 있는 육중한 몸매의 소유자로, 검정 빛깔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 안으로 입은 하얀색 셔츠의 단추 주변이 불룩 나온 배 때문에 팽팽했다. 그 위로 매달린 파란색 넥타이가 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렸다. 잠시 동안 서있던 남자는 바람에 손이 시렸는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구두 안의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상하의 모두 운동복 차림인 한 남자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일찍 나와 계셨네요. 많이 걸으셔야 하는데, 정장 차림으로 괜찮으시겠어요? 구두도 신으셨네요. 발이 많이 아플 텐데.”

“어차피 회사에서는 정장을 꼭 입어야 해서요. 오늘만 이렇게 해보고 정 불편하면 내일부터는 저도 운동복 입고 출근할게요. 정장은 사무실에서 갈아입을 수도 있으니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출발할까요? 보통 제 걸음으로 빠르면 45분, 막히면 50분 정도 걸려요.”

“걸어가는데도 막혀요?”

“아, 제가 횡당보도에서 신호 기다리는 것을 막힌다고 표현해서요. 하하.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대여섯 개 지나가야 하는데, 신호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 더 걸려요.”

두 남자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큰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동복을 입은 남자는 몸매가 날렵하게 생겼으나, 정장을 입은 남자보다 키가 10 센티미터 가량 작았다. 대개 운동화의 굽이 구두의 굽보다 낮으니, 실제 키 차이는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얼핏 보면 둘이 나란히 걷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운동복을 입은 남자가 약간 앞서 나가며 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큰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니 첫 번째 횡단보도를 만났다. 그들은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떠세요? 걸을 만하세요? 어제 오랜만에 운동한 것 때문에 근육이 조금 아프실 텐데.”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옆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정장을 입은 남자는 어느덧 출발 전에 느꼈던 한기가 사라지고, 몸에서 더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양말 속의 발가락에는 벌써 땀이 차고 있었다.



-정은아, 오빠가 정말 미안해. 오늘 아침부터 너무 긴장하면서 시험을 쳤나 봐. 지금 완전히 탈진상태라 꼼짝도 못 하겠어. 그래도 오늘 정은이 생일이라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으려고 기대했었는데. 너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할 수 없지 뭐. 그냥 잘 쉬어. 그나저나 시험 보기 전 마지막 모의고사인데 어때? 잘 본 것 같아?

-아직 채점해보기 전이라서 잘 몰라.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느낌이 좋아.

-그래? 잘됐네. 아무튼 난 괜찮으니까, 오빠는 집에서 잘 쉬어.

-정은아, 잠깐만. 이러지 말고 우리 잠깐이라도 볼까? 혹시 네가 이쪽으로 올 수 있어?

-아, 아니. 사실 나도 조금 피곤한 것 같아서 그냥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그래? 알았어. 정은아, 오빠가 미안해. 나 시험 붙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시험에 붙기만 하면, 내가 더 잘해줄게.

-응, 그래. 오빠는 뭐든지 잘해왔으니까, 이번엔 꼭 붙을 거야. 난 정말 괜찮으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오빠, 내가 이따가 집에 들어가서 연락할게.

-응,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면 문자 보내.

-응.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남자 두 명이 이른 아침에 함께 걷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어젯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장을 입었던 남자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계약한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피트니스 센터는 맞은편 건물의 2층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안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도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시간을 핑계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사원증과 신분증을 내밀어 등록을 마쳤다. 탈의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남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목적은 살을 빼는 거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 남자 트레이너 역시 피트니스 센터에서 제공하는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지만, 팔과 다리만 보아도 과하지 않은 탱탱한 근육이 온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작았지만,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 넓이 때문인지 본래 키보다 커 보였다. 그 트레이너는 먼저 여러 가지 운동기구의 사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무산소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해야 살이 빨리 빠진다고 조언해주었다.

“지금까지 알려드린 운동 기구들에서 자신에게 적당한 무게를 일단 찾으시고, 10회 3세트씩 일단 해보세요. 절대 무리 하시진 마시고요, 하다가 잘 모르겠으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중간중간에 물 마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트레이너가 말했다.

남자는 약 30분에 걸쳐서 트레이너가 시킨 운동을 끝마쳤다. 잠시 동안 운동기구에 기대어 후끈 달아오른 몸을 달래면서 숨을 헐떡였다. 동시에 평소에 쓰지 않은 근육에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흐르는 땀에 운동복이 온통 젖어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갈증이나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 쪽으로 가다가 트레이너를 만났다.

“다 마치셨어요? 그럼 물드시고, 저쪽에 있는 러닝머신에서 30분 정도 걷다 뛰다 하실래요? 아니면 자전거를 타셔도 좋고요.”

“아니요, 너무 오랜만에 운동을 했더니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어요.” 남자는 정수기에서 종이컵 가득 물을 채워 벌컥벌컥 마신 뒤 말했다.

“아 그래요? 무산소 운동을 마치고 바로 유산소 운동을 해줘야 살 빼는 효과가 좋은데. 그러면 집에 가실 때라도 조금 걸으세요. 걷는 게 살 빼는 데에는 최고예요. 저도 집에서 여기까지 항상 걸어 다니거든요.”

“아, 저는 마포 공덕 역 주변에 사는데 여기까지 조금 멀어서 걸어 다니기는 무리인 것 같은데요.”

“아, 저도 거기 살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아침에 저랑 같이 걸어 보실래요? 한번 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보통 몇 시에 출근하세요?”

남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제가 보통 8시에 집을 나서면 9시 전에 여기에 도착하거든요. 시간이 맞으면 한번 같이 걸어 봐요. 생각보다 걸을 만해요.” 트레이너가 한 번 더 권했다.

“그래요. 그럼 한번 해보죠.” 남자가 조금 더 생각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남자는 트레이너와 약속을 정하고, 땀을 닦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나 어제 집 근처 헬스장에 등록했어.

-갑자기 웬 헬스장? 운동하려고?

-응, 나 요즘에 살 좀 찐 것 같지 않아? 엊그제 오랜만에 체중을 재봤더니, 글쎄 3킬로그램이나 늘어나 있는 거야.

-그래? 내가 보기엔 그대로인데?

-보는 거랑 달라. 오빠도 시험공부한다고 살 많이 쪘잖아. 오빠도 운동 좀 해야 돼.

-고시생이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어? 공부하기도 바쁜데. 그나저나 헬스 운동기구들은 다룰 줄 알아? 그거 잘못하면 다치기 십상이고 운동 안 하느니만 못해.

-응, 거기 헬스장이 제법 규모가 있어서 트레이너 두세 명이 항상 있더라고. 운동기구 쓰는 법은 트레이너가 가르쳐 준대.

-다 남자 트레이너들 아냐? 운동 가르쳐 준다고 하고 여자들 몸에 손대고 그런다던데.

-아냐, 여자 트레이너도 있어. 그리고 손으로 잡아줘야 운동 자세 교정해주지, 안 그럼 어떻게 해. 이참에 오빠도 운동 시작해. 오빠 시험공부 시작하고 나서 살이 너무 쪘어. 건강도 생각해야지. 도대체 어떡하려고 그래.

-어떡하긴 뭘 어떡해. 시험에 붙어야지. 그때 가서 운동도 하고 살도 빼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지난번 시험엔 정말 아깝게 떨어졌잖아. 이왕 내년까지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거 더 열심히 해야지. 난 지금 운동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어. 내년엔 반드시 붙을 거야.

-응, 그래...



두 사람은 별 다른 대화 없이 묵묵히 걸어서 각자의 직장이 있는 사거리에 거의 다다랐다.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두어 걸음 앞서 걸었고, 뒤에서 어느덧 넥타이를 풀어버린 남자가 따라 걸었다. 남자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지막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이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걸어보니 어떠셨어요? 땀 많이 흘렸으면, 잠깐 센터에 들러서 샤워하고 가셔도 되는데.”

“땀은 흘렸는데, 지금 샤워할 시간은 안 될 것 같아요. 이따가 점심시간에 잠깐 갈 수 있으면 갈게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훔치며 지친 기색을 애써 숨기고 말했다.

“네, 이따가 또 뵐게요. 잘 들어가세요.”

이윽고 두 사람은 각자의 직장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버튼을 눌렀다. 버튼 옆에는 ‘OO국제특허법률사무소’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3층에서 내린 남자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서 세수를 했다. 세면대 옆에 걸린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고,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다시 맸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연이어 있는 개인 사무실들의 가장 끝에 남자의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남자는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큰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남자는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온 걸 알리고 차가운 커피 한 잔을 갖다 달라고 말했다. 두 눈을 감고 의자의 목 받침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숨소리가 잦아들 때쯤 비서가 커피를 들고 왔다. 남자는 차가운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오전 일과는 지난주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특허명세서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발명품의 도면을 담당하는 직원을 불러 세부사항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누군가 사무실에 노크를 했다. ‘네’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밥 먹고 하자.” 옆 사무실의 선배 변리사였다. 남자는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된지도 몰랐다.

“전 지금 하는 것 좀 마무리하고 이따가 따로 먹을게요.” 남자가 바쁜 티를 내며 선배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야, 쉬엄쉬엄해. 그럼 우리 먼저 나간다. 수고.” 사무실 문이 닫혔다.

남자는 몇 분 뒤, 샤워만 하고 나올 요량으로 길 건너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아침에 흘린 땀은 다 말랐지만, 아직 찐득함이 남아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커다란 몸통 곳곳에서 전해오는 이 불쾌감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어, 오셨네요.” 트레이너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알아봤다.

“네, 샤워만 하고 가려고요.”

“그럼 오늘은 운동 안 하실 거예요?”

“네, 아침에 걸어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고, 어제 운동 때문에 근육통이 생겨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내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내일 아침에 걷는 것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같이 걸어도 괜찮은데.”

“아, 그럼 내일도 같이 걸어올까요?”

“그럼, 내일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봬요.”

남자는 네,라고 말하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남자는 근처 스포츠 의류 매장에 가서 걸어 다니며 입을만한 운동복과 발이 편해 보이는 운동화를 샀다.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마시러 종종 갔던 카페에 들러서 진열된 닭가슴살 샐러드 한 개를 사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날 남자는 정장을 사무실에 벗어두고, 새 운동복 차림으로 걸어서 퇴근했다.



-오빠, 우리는 여기까지 인가 봐.

-또, 헤어지자는 말이니?

-... 응.

-정은아, 너 왜 또 그래. 우리 이제까지 잘 참아왔잖아.

-그래, 계속 나만 참아왔지. 그런데, 나 너무 외로워. 오빠가 옆에 있어도 그냥 외로워.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잖아. 우리 몇 달만 더 참자. 이번엔 꼭 붙을게.

-아니, 이제 시험이랑 상관없어졌어. 그냥 난 이제 다 지긋지긋해. 우린 끝난 것 같아.

-...

-오빠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나도 고민 많이 했어. 그렇지만 나도 너무 힘들어. 이제 못 버티겠어. 난 그냥 멀리서 오빠가 시험에 꼭 붙길 바랄게. 정말 미안해. 갈게.

-......



처음 걷기 시작한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나자, 아침 공기가 더 쌀쌀해졌다. 두 남자의 아침 출근길 동행은 주말을 제외하고 계속 이어졌다. 그 사이 몇 가지가 변했는데, 그중 한 가지는 변리사 남자의 볼이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홀쭉해진 것이고, 다른 변화로는 말이 없던 두 사람의 대화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 보이네요. 요즘에 먹는 것도 신경 쓰고 계시죠?”

“네, 가능하면 술을 안 마시려고 하고, 또 야채도 많이 먹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짠 음식도 최대한 피하시고, 또 단백질을 생각보다 많이 드셔야 돼요.”

“그렇긴 한데, 혼자 살다 보니 음식 챙겨 먹는 게 쉽진 않네요.”

“그런데 살은 왜 빼려고 하는 거예요?” 트레이너가 남자를 보며 조심스러운 억양으로 물었다. 그동안 서로 운동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을 뿐, 사적인 얘기는 거의 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변리사 시험공부할 때, 스트레스 때문에 먹기만 하고 통 운동을 못해서 살이 많이 쪘거든요. 그때 여자 친구랑 헤어졌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떠나간 게 아닌가 싶어요. 자기 관리 못하는 남자는 여자한테 인기가 없잖아요. 이제 변리사도 됐고, 살도 빼서 여자 친구한테 다시 한번 만나자고 해보려고...”

“아, 그 여자 친구 분을 아직 못 잊었나 보네요.”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시험공부한다고 잘 못해줘서 미안한 감정도 남아 있고요. 트레이너님은 여자 친구 있으세요?”

“아 네, 저는 곧 결혼합니다.”

“아 그래요? 결혼식이 언젠데요? 청첩장이라도 보내주시면 저도 가서 축하해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결혼식은 한 달 정도 남았어요. 마침 청첩장은 오늘 나오는데, 나중에 드릴게요.”

남자가 아침마다 운동복 차림으로 회사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비서였다. 그 날 아침 회사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비서로부터 살이 빠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퇴근할 때 피트니스 센터에 들러 운동을 하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 날 남자는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온 뒤, 소파에 벌러덩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문득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탁자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움켜쥔 남자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트레이너로부터 모바일 청첩장이 온 것이었다. 화면을 터치해서 청첩장을 열어 본 남자는 심장이 덜컥하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트레이너 남자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부의 얼굴이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남자는 마치 큰 판돈이 걸린 도박판에서 카드 패를 확인하듯이 천천히 화면을 아래로 내려 신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정은’ 또다시 남자의 심장이 덜컥했다. 모바일 청첩장에 있는 사진들을 여러 번 둘러본 뒤 남자가 뱉은 첫마디는 ‘이 씨발년’이었다. 분노의 찬 거구의 남자 옆에서 누구라도 얼쩡거리고 싶지 않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한 손에 휴대전화를 쥔 채 자기도 모르게 거실을 서성거렸다. 얼마 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급하게 어디론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정은아, 우리 내일 잠깐 볼 수 있을까?

여자에게 답문은 오지 않았다. 그날 남자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어둠이 서서히 물러갈 무렵, 남자는 비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몸이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으니, 휴가를 대신 내달라고 부탁했다. 아침 8시가 가까워지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졌으나 찬물로 세수를 한번 한 뒤, 운동복으로 바꿔 입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정은이니? 나야.

-... 응, 오빠,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잘 지냈어. 오빠는?

-나도 잘 있어. 나 시험에 붙었어. 오늘 최종 결과 발표 난 것 보자마자 너한테 전화하는 거야.

-그래. 잘됐네. 축하해.

-정은아,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정은아, 이제 시험도 합격했으니까 내가 정말 잘할게.

-...

-정은아, 대답 좀 해줄래?

-안될 것 같아.

-왜? 왜 안 돼? 내가 정말 잘한다니깐.

-... 나... 이제 다른 사람 만나.

-뭐? 그 몇 개월 사이에 다른 남자를 벌써 만난 거야?

-... 응. 그러니까 오빠도 이제 다른 사람 만나. 시험도 합격했으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난 너 아니면 안 돼. 정은아, 그 사람이랑 정리하고 나한테 다시 오면 안 돼?

-그럴 수 없어. 오빠도 나 잊고 그냥 새사람 만나.

-...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

-잠깐, 너 나랑 헤어지기 전부터 그 자식이랑 만난 거지? 나랑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그 몇 달 사이에 다른 새끼를 만날 수가 있니?

-오빠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말 좀 가려서 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새끼가 뭐야? 그리고 이제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좀 불편해.

-너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 끊을게.

-... 정은아.

-

-... 이 씨발.



약속 장소인 아파트 입구에는 트레이너가 먼저 나와 있었다. 트레이너는 멀리서 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오셨어요? 날씨가 더 추워졌어요.” 트레이너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곧바로 트레이너가 먼저 몸을 틀어 걷기 시작했고, 남자가 옆에 나란히 붙었다.

“네, 추워졌네요. 어제 청첩장은 잘 받았습니다. 아내 되실 분이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남자는 머릿속으로 아무런 표정을 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때, 시간이 되시면 식사나 하고 가세요.” 트레이너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는 밤새 눌러왔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났어요. 회원 대 트레이너로. 사실 규정상 그러면 안 되는데,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거의 제 이상형에 가까웠거든요. 선한 눈매 하며, 뽀얀 피부가. 그리고 저는 약간 통통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여자 친구가 딱 그랬어요.”

“아? 지금 피트니스 센터에서요?”

“아니요. 운동 가르쳐주면서 몇 번 대화를 해보니, 말도 너무 잘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여자 친구도 비슷하게 느꼈을 거예요. 때를 기다리다가 제가 사귀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어요. 그 후에 제가 지금 피트니스 센터로 옮겨버렸죠. 이전 센터에는 회원과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서.”

“결단력이 있으시네요. 그런데 여자 친구 분이 당시에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렇게 무턱대고 사귀자고 한 거예요?” 남자는 자기도 몰래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경계했다.

“사실, 여자 친구는 당시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대요. 그런데 언젠가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으니, 관계가 서로 안 좋다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에, 제가 그 사람이랑 만나지 말고 나랑 만나자고 말해버렸어요.”

“그렇구나. 그랬더니 여자 친구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에게 시간을 조금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며칠 뒤에 저에게 왔어요.”

“그래도 그 남자에게는 미안하진 않으세요?”

“뭐, 서로 운명이 아니었나 보죠.”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심한 굴욕감에 눈꺼풀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두 사람의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각자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내일은 제가 결혼 준비 때문에 일이 있어서 같이 걷지 못할 것 같네요.” 트레이너가 헤어지려 돌아서는 남자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결혼 준비 잘하세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비서와 마주쳤다.

“아, 변리사님, 오늘 대신 휴가 내달라고 하셔서 벌써 냈는데 여기에는 웬일이세요?”

“아, 잘하셨어요. 몸이 안 좋긴 한데,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요. 이따가 금방 갈 거예요.” 남자는 순간적으로 거짓말로 둘러댔다. 사무실로 들어온 남자는 의자를 창 쪽으로 가져간 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거의 눕는 것처럼 앉았다. 사방이 조용하고 어두웠는데,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사무실의 불을 켜는 것을 잊은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겨 왔다.



-...... 전화 좀 받아라, 정은아. 이 씨발년.



남자는 잠깐 잠들었다 깬 줄 알았는데,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반쯤 뜬 눈으로 창밖에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든 건지 아닌지 자신도 모를 시간들이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무렵, 남자는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으나, 자신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때, 창밖으로 맞은편 건물 입구에서 트레이너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어이 깜짝이야. 야, 너 뭐야, 사무실에 있었어? 넌 이제 운동복 입고 근무하냐?” 옆 방 선배 변리사였다.

“저 오늘 휴가예요.”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며 말했다. 건물 밖으로 나간 남자는 사거리의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트레이너를 보았다. 남자도 역시 반대편 지하철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트레이너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승강장에 들어오는 지하철에 승차했다. 지하철에 올라서자마자 트레이너가 있는 객차 옆 칸으로 옮겨갔다. 객차 안은 퇴근 시간 승객들로 가득해서 그 틈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남자는 트레이너가 환승역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트레이너가 환승 구역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 지하철에서 내렸다. 남자는 트레이너가 갈아타려는 노선에 여자 친구의 집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가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 끝까지 조심스럽게 미행한 결과, 남자의 짐작대로 트레이너는 여자가 살고 있는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여자가 살고 있는 방을 찾은 순간, 창문으로 불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남자는 이를 꽉 깨물었다.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한 시간 가량 건물 주변을 서성거린 뒤, 근처의 페인트 가게에 가서 공업용 시너를 한통 사 왔다. 근처 놀이터에 있는 쓰레기통 안에 시너를 숨겨두고, 원룸 건물 맞은편의 편의점으로 가서 삼각김밥과 맥주 그리고 라이터를 한 개씩 산 뒤, 다시 놀이터로 돌아갔다. 남자는 초췌한 몰골로 어두운 놀이터 벤치에 앉아 김밥을 오물거리며 먹었고, 퀭한 눈으로 건물을 계속 주시했다. 밤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이 놀이터 옆길로 지나갔으나, 아무도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여자의 방에서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했다. 트레이너는 끝내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씨발년, 나한테는 혼전순결이니 뭐니 지랄을 하더니만 결혼도 하기 전에 동침을 하는구나.” 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로부터 3시간을 더 기다린 남자는 쓰레기통에서 시너를 꺼내어 들고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사는 방 입구와 문틈에 다 쏟아부었다. 일부는 계단으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옷으로 코를 감싸며 냄새를 막으려 했지만 신나 냄새가 코에 진동했다. 몇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라이터에 불을 켰다. 약한 라이터 불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는 음영이 심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자신의 숨소리마저 고요했다.

그로부터 20분 뒤, 어둡고 고요한 서울의 한 주택가가 환해지며 사방이 어수선해졌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그로부터 2시간 뒤, 소방차가 화재진압을 거의 마쳤다.

그로부터 3시간 뒤, 관할 경찰서장은 사망자가 6명, 부상자 12명을 낸 방화로 인한 화재 사건으로 공식 브리핑을 했다. 그 시각, 남자는 집에 돌아와서 입고 있던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남자는 젖은 몸을 말린 뒤, 검은색 톤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남자는 곧 회사에 갈 참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오늘은 차를 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시간의 충돌은 언제 일어나는데?

-서로 운명적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우리는 시간의 충돌이 발생했을까?

-그건 몰라. 그런 건 항상 나중에 가봐야 아는 거니까.

-우리 둘 사이에도 시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건 절대로 모르는 거라니깐. 두 사람이 다 죽을 때까지는.

-만약 그랬으면, 내 시간은 뺏기지 말고 정은이 시간을 빼앗아오기만 해야지. 하하.

-뭐? 이 나쁜 놈아, 그래 나 먼저 죽을 테니까 오빠 혼자 천년만년 잘 살아봐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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