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렸다. 병욱은 아직 자고 있었다. 거울 옆에 드라이어가 보였으나, 병욱이 자는데 방해가 될까봐 켤 수는 없었다. 조용히 쇼핑백에서 새 옷을 꺼냈다. 바지를 먼저 입었는데 지난밤 과음, 과식을 한 탓인지 배가 나와서 약간 허리가 약간 타이트한 느낌이었다. 새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고, 예전 바지에서 허리띠를 빼서 찼다. 머리를 마저 말렸다.
병욱을 깨웠다.
“야, 일어나서 출근해야지. 난 나갈 준비 다 했어.”
병욱이 눈을 반쯤 떴다.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벌써 나가냐? 너 이따가는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는데. 어떻게 할지.”
“그냥 집에 가, 새끼야. 오늘은 안 재워준다. 경희 올지도 몰라.” 병욱은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냥 하던 대로, 살던 대로 살아라. 너 예전에 그 누구냐, 전에 걔랑 헤어졌을 때에는 담담했잖아. 방황은 너랑 안 어울려. 사람이 일관성 있게 살아야지, 사람이.”
“난 간다. 너도 출근해라.”
나는 대답을 피했다.
이틀간 입은 옷은 병욱의 집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처럼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내내 ‘오늘은 어디서 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쓸데없는 오기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도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마침 금요일이라서,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
‘옷 갈아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
속으로 생각했다.
잠잘 곳을 찾지 못하면, 오늘은 모텔에서 자기로 했다. ‘모텔에 혼자 가본 적이 있던가.’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철이 학교 근처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바람에 머릿속의 생각이 흩어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이목련 선생님의 집에 도둑이 든 사건이 화제였다. 이목련 선생님은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경찰이 CCTV를 분석 중에 있다고 했다. 어제는 무서워서 친구네 집에서 잤다며,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도둑이 또 오면 어떡해요. 이사를 가야하나.”
‘집에 안 들어가는 사람이 나 말고 여기 한 명 더 있네.’
자리로 돌아오며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지개를 펴며 복도를 따라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낮에는 이제 따뜻해져서, 밥 먹고 오후 수업시간에는 선생이나 학생이나 나른했다. 복도 끝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으려고 주머니의 동전을 뒤적거릴 때였다.
“저기 이 선생님, 잠시만요.”
나는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나를 부른 것은 이목련 선생님이었다. 키가 170 센티미터 정도로 큰 이목련 선생님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네, 이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나는 바지에서 냉큼 손을 빼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선생님한테 부탁이 있는데요. 혹시 집에 잘 안 신는 신발 같은 거 있으면 몇 켤레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사니까 무섭기도 한데, 다른 선생님들이 현관에 남자 신발 몇 개 가져다 놓으라고 하셔서.”
이목련 선생님은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이제는 닳아서 잘 안 신는 구두도 있구요, 헤져서 잘 안 신는 운동화도 있어요. 제가 가져다 드릴 수 있어요.”
하고 선심 쓰듯 말했다.
“다음 월요일에 출근할 때 가져다 드릴게요.”
이때까지, 나는 집에 가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요,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안 되구요. 이따가 퇴근하실 때 제가 댁에 같이 가서 신발만 받아가도 되는데, 오늘 퇴근하시고 곧장 집으로 가세요?”
이목련 선생님의 이 말에 갑자기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고민하다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아니요. 저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제가 월요일에 꼭 가져다 드릴게요.”
이목련 선생님은 작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살짝 목례를 하며, 커피를 한잔 뽑으려던 생각도 잊은 채 교무실 쪽으로 향했다.
이제 말을 뱉어놨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꼭 집에 가야 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고집부리지 말고, 이참에 집에 들어갈까, 하고 고민도 했지만, 나는 주말까지 더 버텨보기로 했다.
미정과 가끔 가던 신촌의 모텔로 향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신촌 거리는 젊은 대학생들로 보이는 무리가 많았다. 며칠 만에 이 거리를 혼자서 다시 걷고 있다는 사실보다, 혼자 모텔로 향하고 있는 내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모텔에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신나게 놀고 모두들 집으로 가겠지? 집에는 왜 가는 걸까? 집 말고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럼 집 말고 갈 데가 있으면 집에 안가도 되는 거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나는 집 말고 갈 모텔이 있단 말이다.
“방 없어요.”
모텔의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 금요일 초저녁에 와서 숙박할 방을 찾으면 우린 어떻게 해요. 이따가 11시 넘어서 한번 와보세요. 대실하는 손님들 나가면 숙박 놓을 방 나올지도 모르니까.”
아저씨는 짜증을 애써 숨기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은 나는 터벅터벅 모텔에서 나왔다.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합리적인’ 모텔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근처에 신발가게가 보여서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이목련 선생님에게 헌 신발을 주게 되면, 왠지 새 신발을 사놔야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자 운동화 코너가 어디인지 살펴봤다. 다양한 스타일과 브랜드의 운동화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학교에 신고 다닐 것은 아니고, 그냥 운동할 때나 주말에 편하게 신을 만한 신발을 몇 개 골랐다. 점원을 불러 280 사이즈로 신어볼 수 있냐고 물었다. 주황색 유니폼을 말끔하게 입은 점원은 옆에 쌓은 신발 상자들 사이에서 280 사이즈를 찾아내 내 앞에서 신발을 꺼내어 주었다.
“천천히 신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말씀해주세요.”
하며 다른 손님이 찾는 곳으로 갔다.
나는 운동화 몇 개를 신어보고, 그 중에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한 개를 골랐다. 회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브랜드 로고가 적힌 요즘에 유행하는 스타일의 운동화였다. 손을 흔들어 아까 그 점원을 불렀다. 점원이 급히 내 쪽으로 왔다.
“사이즈는 잘 맞는데, 혹시 이거 다른 색깔도 있어요?”
점원은 고개를 저으며, 이 디자인으로는 이 색깔 밖에 안 나온다고 하였다.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혹시나 해서 그냥 물어본 말이었다. 나는 신발 상자가 든 쇼핑백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토요일-
늦은 아침, 머리맡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알람인 줄 알고 꺼버렸다.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옆에서 자고 있던 경희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 좀 받으라고 말한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현규였다. 현규는 대뜸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어제는 어디서 잤냐?”
나는 현규의 점심 약속에 응하는 대신 궁금한 것을 되물었다. 작은 목소리로 ‘모텔’이란 단어가 들려왔다.
“우리 현규가 돈이 썩어 나는구나.”
지금 경희랑 같이 있는데, 오고 싶으면 이쪽으로 오라고 했더니, 현규는 그럼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밤에는 혹시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냥 모텔에서 살아라.”
라고 답하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냥 집에 가, 이 미친놈아.”
나는 한마디 덧붙이며 전화를 끊었다.
“현규 오빠, 어제도 집에 안 들어갔대?”
통화내용을 들은 경희가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그런가봐, 이 미친놈은 왜 안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점심 먹자더니, 너랑 있다니까 안 오겠대.”
“난 같이 점심 먹어도 상관없는데.”
“그럼 다시 전화해볼까?”
“마음대로 해.”
“아니다. 됐다. 엊그제 봤는데, 뭘 또 봐. 그러다 말겠지, 뭐.”
나는 핸드폰을 집었다, 다시 머리맡에 놓는다. 방 한 구석에 어제 현규가 놓고 간 옷가지가 보였다. 언제 찾으러 오려나, 내가 갖다 줘야 하나, 하는 찰나의 고민이 들었으나 옆에 누워있는 경희를 보자 금세 사라졌다. 경희 옆으로 바짝 붙어 누우며 한 팔로 경희를 껴안았다. 지난밤의 거친 호흡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집이 제일 좋던데. 하여간 이 미친 놈.’
-일요일-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만 돌리고 있는 남편을 설득해서 아파트 근처 마트에 왔다. 카트 안에 타겠다며 떼를 쓰는 아이를 두고, 남편과 나는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가뜩이나 살 것들이 많은데, 아이가 카트 안에 있는 것이 신경이 쓰여 싫었다. 애를 응석받이로 키우려는 건지, 남편과 아이의 고집에 결국 아이를 카트 안에 태우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마트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편이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카트를 밀고 나는 필요한 것들을 부지런히 주워 담았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현규는 혹시 오늘 밤 집에 와도 되냐고 물었다.
“또, 자고 가려고? 너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어?”
나는 휴대폰을 가리키며, 남편에게 소리 없이 ‘현규’ 이렇게 입모양을 하고는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갔다.
휴대폰 너머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어제는 어디서 잔거야?”
현규는 병욱이네서 잤다고 했다.
“처남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대?”
어느덧 옆에 다가온 남편이 물었다.
나는 손짓으로 남편을 물리고, 현규에게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너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가면, 시골에 엄마한테 이른다. 엄마 잔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얼른 들어가.”
그 소리에 갑자기 현규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현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현규는 받지 않았다.
“얘가 전화를 안받네.”
“곧 들어가겠지. 자기가 집에 안가고 어디 갈 거야?”
남편이 나를 안정시키려는 듯 말했지만, 말투에 특유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휴대폰에서 병욱이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지 찾아봤다. 결혼하기 전에 현규랑 같이 자취하고 있을 때, 병욱이가 집에 종종 놀러 왔었지만 따로 전화번호를 저장해두지 않았나보다. 병욱이 전화번호를 누구한테 물어봐야하는지 생각하다가, 카트 안에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자 그만 두었다. 나는 조용히 하면 과자를 사주겠다며 아이를 달랬다. 나는 카트를 미는 남편을 이끌고 과자 진열대로 향했다.
-월요일-
어젯밤 현숙이와 늦게까지 술을 홀짝이며 노닥거렸더니, 아침에 늦잠을 잤다. 고등학교 동창인 현숙이가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쩍 더 친해졌다. 얼마 전 집에 도둑이 든 후로는 나는 현숙이의 자취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그것이 같은 학교에 총각 선생님을 계속 소개시켜달라고 하는 바람에 밤늦게 까지 얘기가 길어졌다. 일어나자마자,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현숙이가 어제 밤에 했던 말이 출근길에 자꾸 떠올랐다.
‘그 총각 선생님, 니가 관심 있는 거지?’
나는 ‘아니’라고 눈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선생님, 아마 여자 친구 있을 걸?’
하고 맞받아 쳤다.
학교에서 유일한 총각인 그 선생님은 따르는 여학생들이 많을 정도로 인물이 괜찮았다. 그런 선생님과 섣불리 소문이 잘못 났다가는 학교 안이 시끄러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학교에 도착하여, 교무실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현규 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은 듯 했다. 교무실을 가로질러 그의 빈자리를 지나, 내 책상에 도착했다. 의자 옆에 웬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쇼핑백 안에는 신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새 남자 운동화였다. 회색 바탕에 큼지막하게 상표의 로고가 파란색으로 적혀있었다.
‘이현규 선생님이구나.’
‘새 신발을 사다 주셨구나. 헌 신발도 괜찮은데.’
입가에 조그마한 웃음이 번졌다. 나는 신발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난생 처음으로 남자 신발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현숙이에게 비밀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