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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을 읽고

by 우유좋아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을 읽고


살다 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길거리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를 볼 때,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작은 불편함들이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기분을 흐리게 만든다. 예전에 명상과 관련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는 마음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은 외부의 자극과 자신의 감정을 연결짓지 않는다고 했다. 언뜻 들으면 타당한 말처럼 보인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흘러가리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천진한 생각인지, 때로는 위험한 태도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사에 무감각해질 수도 없다. 풍족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내 삶에 주변인들이 작은 파도를 만든다. 그 파도가 일으킨 물결이 내 삶을 관통할 때,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다.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 큰 물결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결은 언젠가 지나가고, 삶은 다시 평온해진다. 단, 이전과는 조금 다른 평온함이다. 그 흔들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음을, 언젠가 또다시 삶에 물결이 일렁인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하지는 못하더라도 거부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백수린의 단편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 속 주인공들의 삶에도 작은 물결 하나가 인다. 그리고 그 물결이 지나가는 동안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들이,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게 포착된다.


(스포일러 주의)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평생 교육원에서 수필 쓰기 수업을 듣는, 혼자 사는 할머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결혼해 출가한 딸과의 관계는 살갑지 않다. 젊은 시절, 재래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팔다가 은퇴한 그녀의 일상은 규칙적이다. 오후 3시에 개설된 수업이라 그냥 신청했을 뿐인데, 막상 글을 쓰려 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사위가 앵무새 한 마리를 맡긴다. 아이들이 좋아할 줄 알고 샀지만, 한번 쪼인 후로 무서워해 집에서 키울 수 없다고 했다. 딸은 이런 부탁을 할 때 꼭 사위를 보낸다. 처음엔 노란 솜털이 날려 곧바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앵무새를 점점 좋아하게 된다. 심지어 주변 시선을 신경 쓰면서도 앵무새와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앵무새를 돌보며 그녀의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백부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던 어린 시절, 얼굴의 수두 흉터, 짝사랑했던 옆집 춘식이 삼촌, 가게 일이 바빠 딸의 운동회에 가지 못했던 날들…. 그리고 어느 날, 사위가 다시 앵무새를 데려간다. 마음을 붙였던 존재가 사라지자 그녀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 수필 쓰기 수업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빛이 다가올 때>는 시력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돌보느라 자신의 욕망을 접고, 큰이모가 원하는 삶을 따라 살아온 사촌 언니의 이야기다. 결국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결혼도 하지 못한 채 40대를 맞이한 그녀는 뉴욕에서 교환교수로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주인공과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뉴욕 곳곳을 둘러본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가던 카페에서 스무 살 남짓한 남자 종업원을 향한 언니의 시선을 포착한 주인공은,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빛이 깃드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동안 늘 이모의 기대 속에서 살아온 언니에게 그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찾아온 솔직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주인공이 어느덧 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뉴욕에서 보냈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오래전 지나갔지만 분명 존재했던 그 순간을.


<눈이 내리네>는 대학 시절, 엄마의 5촌인 이모할머니 댁에서 하숙했던 다혜가 그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수치심 없이 아무 때나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는 할머니와 대비되는 다혜의 대학 생활은 풋풋하기만 하다. 사랑을 시작하고, 긴 연애를 한다. 시간이 지나, 30대가 된 그녀는 과로사한 대학 동기의 장례식에서 친구들의 소식을 듣는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친구, 이혼 소송 중인 친구…. 젊은 날 영원할 것만 같던 것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녀 역시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다. 살면서 수십 번이나 보았을 첫눈을, 마치 처음 본 듯 기뻐했던 할머니. 늦깎이 학생이 되어 한글을 배우며 글자를 읽게 된 기쁨을 누렸던 할머니. 하루라도 아프지 않고 살고 싶다며 전신마취를 감수하고 어깨 수술을 받으려 했던 할머니. 그렇게 끝까지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노인과, 아직 젊지만 이미 인생을 다 산 듯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며 마음 한구석이 저려온다.


그 외에도, 15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본인 친구와 알쏭달쏭한 감정을 나누는 <봄밤의 우리>, 낡은 집 마당에서 수많은 화초를 키우며 살아가는 노인의 죽음을 본 후의 감정을 담은 <호우>, 영국인과 결혼한 딸과 멀어진 아버지가 스위스의 설원에서 묘하게 화해하는 <흰 눈과 개>, 그리고 40대의 끝자락에서 대학 동창들과의 여행 중 삶의 한 조각 빛을 발견하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소설들이 있다.


백수린의 소설은 주로 여성의 삶을 다루지만, 등장인물들이 나와 비슷한 연배라서 그런지 남자인 나도 공감이 잘 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지루함을 ‘평온함’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눌러가며 살아가는 날들, 그렇다고 그 평온함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비쳤다.

소설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가오는 작은 물결을, 너무 쉽게 거부하고 있던 건 아닐까? 귀찮아서, 낯설어서, 혹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놓쳐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사소한 것들이 가져올 기쁨과 슬픔까지 모두 놓쳐버린 건 아닐까.

그러니 이제는, 작은 물결 하나가 내 삶에 스며든다면, 망설이지 않고 맞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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