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약_10.19

by 소산공원

오늘도 역시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다.

약간 오늘을 위해 많은 길을 돌아온 것처럼 단단하고 물렁한 날.



1.

어제도 1시 넘어서 집에 도착하곤, 억울한 맘에 꾸역꾸역 맥주 두 캔을 먹고 잤다. 이제는 500ml 한 캔쯤은 조금 무리하면 4모금 안에 끝낼 수 있다. 차가운 물을 못 마셔서 한 여름에도 냉장고에 물을 넣어두지 않는데, 도대체 맥주는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게 되는걸까? 맥주를 마실 땐 인간 파이프가 된 것 같다.

점심에 어죽을 먹고 아슬아슬 마감을 맞추고 서울로. 서울역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1에게 들러 ‘집 앞이야 나와’를 시전하고 기운나어죽이랑 기운나포도주스랑 바꿔먹었다. 서소문성지에 잠깐 들러 콘솔레이션홀에 약간 누워있었다. 눈이 침침한데도 자꾸만 보고 싶고, 그러나 저절로 감기는 포근한 공간. 오늘은 지난번에 못 본 바위가 보였다. 정확히는 돌로 된 벽. 커다란 바위가 있는 산에 가고 싶어졌다.



2.

오늘의 목적지는 포도밭 인스타에서 본 ‘어떤 계약’이라는 토크 자리. 수유역에 가는 김에 친구2의 스토리에서 보고 내내 탐내던 커피집에 갔다. 탐욕스럽게 한 잔을 더 하고 싶었지만 아메리카노가 궁금해서 또 한잔 커피를 마시고 친구3이 준 짧은 책을 읽었다. 옆에 앉은 애기에게 챙겨간 눈알을 슬며시 나누어줬다.




3.

시간이 넉넉히 남아 수유역에서 창동 레지던시까지 걸어가는 길에 야끼만두를 발견. 나는 야끼만두를 상도동 오시오떡볶이식으로 걸레만두라고 부르는데, 서울에서 걸레만두를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오래 마음이 쓰인다. 그 때 먹을 걸..하고. 결국 만두를 먹느라 택시를 타게 되었는데 웬 낯선 원룸 골목에 차를 세워주신다. 조금 걷다보니 창동 레시던시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보이고.. 왜인지 커다란 대문이 꽁꽁 잠겨있다. 옆문이 있나? 양옆으로 담벽을 살펴도 옆문이나 쪽문 같은 것이 없다. 내가 포스터를 잘못 본 것인가? 원래 그냥 정말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토크’라고 적은 자리에 온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이 닫힌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아 급히 DM를 보내고 연락처를 묻고,, 또 <에에올> 세계관에 빠져 다른 우주에서 토크쇼가 열리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문이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10분쯤 서성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생맥주나 마시자고 술집을 찾으며 걷는데 다행히 징규샘과 연락이 닿았다. 결국 많이 지각한 채로 정문을 찾아 입장. 징규 샘이 발로 문을 뻥! 차며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걸 안 해서 무척 아쉬우셨는지, 객원멤버라도 된 거 마냥 자주 토크 중에 나를 호명을 하시더니 급기야는 공개 프로포즈를 하셨다. 책을 만들게 된 연결고리로 후지이다케시 책에서, 예림 책을 만들게 된 이야기로, 예림 샘의 토크콘서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훅 엄지도장이 날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기에 눈알의 결연. 나중에 징규샘이 징징 울게 되는 그날이 올까 조금 무섭고 벌써 미안하지만. 오랫동안 닻과 돛이 되어줄 일이 생긴 것 같다.



3.

아 아직 본문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군더더기가 이렇게 많은 일기라니. 아무튼 바쁜 와중에 ‘어떤 계약’ 자리에 간 이유는 사과나무의 고민 중 하나인 ‘어떡하지 계약’을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을 시작했던 것은 작년 이맘때쯤인데, 가을과 겨울 사이에 해마다 해오는 일, 특별히 우리를 괴롭게 하던 일이 있었다. 시내와 대화를 나누던 끝에 괴로움에서 건져줄 방패로 내년엔 계약서를 써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일의 범위와 시간, 소통의 방식들을 협의하는 단단한 문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장님까지 함께한 회의에서 그 일의 괴로움을 토하며 계약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사장님은 종이에 적힌 말들이 포함할 수 없는 일들이 생활 안에서 존재하고, 계약서가 그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 회의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여튼 내가 문제해결의 방편으로 계약서를 생각했다는 사실이 나중에는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일의 약속을 선명하게 할수록 일이 편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그 때 제안한 계약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리가 약속한 시간과 방법을 너희가 어겼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하지 않거나 망치거나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달까.(을인거 맞냐) 사실은 일을 잘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올해도 역시나 그 일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원고가 들어오기 몇 주 전에 미리 연락을 했다. '혹시 올해도 이 일을 함께 하게 된다면, 우리 먼저 회의할까요?' 미리 만나 일정을 약속하고, 범위와 예산을 의논하고 함께 나눈 내용들을 메일로 전했다. 여전히 그 일을 하는 건 두렵지만 적어도 일의 주도권까진 이니어도 그저 억지로 멱살 잡혀 끌려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한 건 계약서보다는 협업의 관계와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런 클라이언트들을 만드는 일도 지역에서 해보고 싶은, 해야만 하는 우리의 숙제다.

‘어떡하지 계약’에 대한 두 번째 고민. 올해 처음 제안자의 입장에서 계약서를 써봤다. 전에는 을의 입장에서 계약서를 받으며 그저 ‘눼이눼이’하면서 도장을 찍고 서류를 보내는 일에 급급했다면 난생처음 반대의 입장이 된 거다. 표준계약서들을 찾아보고 주고받았던 많은 계약서들을 찾아본 중에 가장 서로의 입장을 배려한 샘플을 골라 항목을 짚으며 만들어 보냈다. 그럼에도 창작자분이 저작권 관련 부분과 세심한 곳곳을 살펴봐주셨고 나는 ‘오호 그렇군요’ 하고 수정해나가며 계약서를 완성한 뿌듯한 기억. 수정요청을 받을 때마다 조금 창피하기도 했지만, 서류 앞에 서면 대체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문서의 영역을 능숙히 다루는거지? 학원 다니나? 아무튼 이 후엔 부러 멋 부리지 말고 이해한 범위 안에서 제안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을 다루자는 다짐을 했다. 최근에 또 제안자로서 계약서를 쓰게 될 일이 생겨, 보내준다고 약속해놓고 여전히 문서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중에 ‘어떤 계약’ 자리를 만나게 된 것. 와 가위, 바위, 보로 쓰면 되는구나....무려 여섯 명인데 난 뭘로 하지.... 이런 류의 용기와 지혜를 얻었다. 적어도 내가 계약서를 제안하는 이유는 ‘나는 너를 믿지만 나를 못 믿기 때문에 너를 지켜주고 싶어’이니까. 책임전가와 회피의 약속이 아닌, 나와 너를 지키고 배려하는 계약서. 좋은 약속을 만들어내는 사과나무의 계약서를 써보아야겠다. 물론 전제는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뉘예뉘예계약서 앞에서 싸울 수 있는 눈을 키우는 일. '어떤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필요한 이유다.


4.

아, 징규샘 피드에서 ‘사라지는 돌’을 보곤, 꼭 갖고(!) 싶어 동네책방에 문의했더니 구하기 어렵다 하신다. 아무래도 절판이 된 듯 했다. 그런데 오늘 그 책의 굴로 기어들어간 게 아닌가! 그리고 책을 살펴보니 그 저자님이 앞에서 토크 토크 해주신 게 아닌가! 이 쯤 되니 막 돌이랑 나랑 서로 누가 더 사랑하나 싸우고 있는 것 같다. 히히 이것 참. 다행히 2쇄가 곧 나온다고 하고 그래도 만난 김에 초판이 갖고 싶어서 약간의 때가 뒹굴뒹굴 묻은 책을 살 수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후딱 탐하며 읽었다. 아 단숨에 사로잡힌 한마리 돌이 된 기분. 책을 만드는 일은 일대일로 만나는 과정 같다고 말하셨는데, 나는 오늘 충분한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얼른 보고 다른 친구한테 소개팅해줘야지. 어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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