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와 드디어 일기쓴다!
집에 온 이후로 3개의 글을 써야하는데, 제일 쓰고 싶은 일기를 마지막 순서로 두었다.
디자인 일을 할 때 보통은 반대로 한다.
대체로 재밌을 것 같은 일 > 그나마 괜찮은 일 > 정말 하기 싫은 일 순서로 일하는데,
재밌고 그나마 재밌는 일로 에너지를 조금 쓴 다음에 남은 에너지로 어차피 꼭 해야하는 일을 한다. 그 일을 안하게 되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억지로. 만약 정말 하기 싫은 일을 가장 먼저 배치한다면 그 일에 에너지를 전부 쏟아서 그나마 괜찮은 일과 재밌을 것 같은 일을 망치게 될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거꾸로 순서를 정하는 걸 발견하고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다듬으면 되는 일을 쉬운 제일 앞에 배치하고, 그나마 괜찮은 일을 중간에 두고, 재밌을 것 같은 일을 가장 뒤에. 일을 하나씩 끝낼수록 기다린 보람이 생기는 듯 충전이 되고, 마침내 두번째 글을 끝냈을 때 아유 좋아! 이렇게 되었다.
사실은 글쓰기는 가장 깊숙하게 숨겨둔 보물과 같은 일이다. 2003년 다모임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포털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흩날라갔지만, 어쨋든 키보드로 일기를 쓰는 순간의 홀가분함을 좋아했다. sns에 꽤나 오랫동안 쓰면서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3때 남들 몰래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고 아부지에게 살짝 말했는데, 알콜중독이면서 시인을 꿈꿨던 아버지는 갑자기 제정신으로 변하더니 주변에 문예를 하면서 망한 친구들의 사례를 그러모아 나를 납득시키려 했다. 심지어는 카피라이터인 친구에게 알음알음 연락하더니 '아이야 글로 먹고 사는 일은 힘든거란다' 라는 통화를 하게 했다.
아부지때문인지 뭔지 아무튼,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을 정말 함부로 말하고 결정하는 타입인데도 말이다. 누군가 종종 책을 쓰고 싶냐고 물어도 나는 전혀 그럴 수 없다했다. 특히 책을 쓰는 일엔 홀로 날카로운 경계를 세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겠노라 결정할 때 계기판과 눈금이 필요하다는 일기에 쓴 것처럼, 너무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일 앞에 크게 주저하게 된다. '글쓰는 일'은 나에게 가장 닿을 수 없는 눈금이었다. 내가 독립출판을 즐기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나에게 너무너무 신성하고 귀한 영역이다. 아무튼 징규샘이랑 엄지도장을 찍고도, 그저 꿈 같은 일-이라고 여기다가 약속 날짜를 잡는 문자를 보고 또 손이 덜덜 떨렸다는 오늘의 심경을 이리도 길게 말하고 있다.
2.
오랜만에 팽팽문화제. 오늘도 빠짐없이 <에에올>이 생각난다. 영화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도대체 눈알은 언제나왕,..(눈알좋아함)두근두근 기다리던 때에 갑자기 양자경의 이마 가운데 총알이 꽂히더니 그대로 눈알로 변해버렸다. 눈알은 웨이먼드 다정과 유우머의 상징. '나도 당신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기로 했어'라고 말했을 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싶었지만 그럴새도 없었다. 총알이 눈알로 바뀌는 순간! 난리법석 멤버들, 평화바람 식구들이 생각났다.
난리법석 식구들은 현장들을 지키며 싸우거나 연대하는 친구들이다. 나는 발톱만치도 못 따라갈만큼 싸우면서도 다정하다. 그들을 깊게 존경하지만, 사정없이 귀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기 때문.......(말부족) 다정한 혁명. 다정의 방식대로 싸우겠다는 의지. 나도 그들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3.
군산에서 돌아와 아산에서 인터뷰를 했다. 이주여성연대를 비롯한 갖가지 활동을 하는 결혼이민자의 인터뷰였다.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못하는 그는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시스템이 엉망인 순간의 빈 틈에서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그런 일을 할수록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니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세상은 점점 나빠지니까, 해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그것을 시스템이 아니라 씩씩한 그가 혼자 감당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또 찔끔났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라고 묻자 외면하지 못해서 모른 척하고도 마음에 걸려서란다. 좋은 세상은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드는거다.
또 어쩔 수 없이 <에에올>얘기를 해야하는데, 나는 블랙 베이글에서 조이를 구한 이유는 외면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눈 앞에, 허무를 벗어던지고 강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데 누가 안 구해? 이후에 존나 오바스럽게 '나는 너의 엄마니까~'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말로 바꿔도 무관하다. '나는 사람이니까'.
4.
인터뷰를 끝낸 뜨거운 마음으로, 뜨거운 붕어빵을 먹었다. 붕어빵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데인 마음. 아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 그치만 아차산 두부 막걸리가 샘나던 아침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서 해질녘의 곡교천을 걸었다. 요새는 하늘이 뭔가 탁해서 맑은 노을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물에 반짝반짝 비추던 모습.
온민박에서 빨간하늘을 보고 싶어서 급히 이동하는데 신호를 대기하다가 그만 어두워져버렸다. 아쉬운채로 깜깜한 온민박을 혼자 산책했다. 이것도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담벼락 안에 있는 안전한 어둠. 길을 걷는데 돌과 나무들이 말을 걸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중간에 길을 잃어 연못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게되었는데 그때부터 막 주변의 새들이 끼익끼익 울면서 조금 무서워졌다. 목성을 달 삼아서 마음을 달래며 밤 산책 마무리.
5.
카페온양에서 무지무지 이쁜 화병을 보았다. 아, 화병을 산다는건 빛과 그림자를 사는거구나. 물건은 겉모습과 쓰임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소재나 형태나 그 바깥의 것들을 상상할수도 있겠군! 조금 더 신중하게 예쁜 것들을 많이 사야겠다는 다짐.
6.
이 일기를 쓰다보니 갑자기 글쓰기에 다정하고 싶어진다. 책은 언제나 투쟁의 현장이지만, 좀 더 힘을 빼고 다정한 마음으로 싸우면서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