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_11.03

by 소산공원

어제는 결국 세차를 했다. 일이 많아 쩔어버린 탓도 있지만 몸을 쓰지 못해서 열이 몸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시간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외부 세차하는데 5천원이나 써버렸지만 괜차나. 차가운 물을 뿌리고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정초에 하는 냉수마찰이 생각났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스펀지로 바깥을 박박 닦았다. 찬바람에도 땀이 조곰 났다. 내부세차를 할 때는 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약간 안간힘을 썼다. 사실 엄청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하지만 내 세차시간은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닦고 광내는 일은 정말 귀찮다. 그러나 세차장엔 언제 어느시간에 가든 세차에 미친 사람들이 꼭 한 명 이상은 있다. 정말 정말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세계다. 그렇게 공을 들여 세차하고 바깥에서 물 웅덩이라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모레바람이 불거나 큰 차 뒤를 따라가다가 우수수 낙엽이 떨어진다면? 비가 온다면? 바깥세계는 언제나 위험하고 변수가 가득한데도 오늘 내 차를 번쩍번쩍 갈아내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까? 수련과 수행이 별건가? 나중에 세차광의 인터뷰도 해보고 싶다.

여튼 정말정말 오랜만에 몸을 쓰니까 기운이 났다. 오늘은 저녁에 일을 하다가 갑자기 클라이밍장에 가고 싶어졌다. 겨울에 하기 좋은 운동이었는데. 차엔 항상 암벽화를 가지고 다니는데 앞으론 볼더링팬츠도 들고 다녀야겠다. 여유가 언제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을 해야 몸이 회복될 것 같다.


오늘 낮에는 내가 아는 가장 무해한 인간들을 납치했다. 어제부터 이 만남을 기다리며 준비했던 풍경이다. 앞자리에 시내를 앉히고, 뒤에 사장님과 호철을 태운 다음 천안역에서 진규샘까지 뒷자리에 나란히 태우기. 그리고 나는 씩씩하게 큰 도로를 운전해서 천안 최고의 만두전골을 멕이러 가는 풍경. 어찌나 기대했던지 꿈까지 꿨는데, 다행히도 와글와글한 와중에 오미오미하게 만두 전골을 먹을 수 있었다. 이주치 해장을 해치우고 요근래 먹어왔던 맥주 중에 가장 맛난 맥주도 먹었다. 배를 채운 후 본래의 목적지인 고향산장에 갔다. 사과나무의 짧은 점심 소풍 코스인 고향산장을 꼭 꿈나무에게 경험시켜주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가을에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주보다 훨씬 붉게 물들었다. 은행나무잎은 길을 두툼하게 덮을 정도로 떨어져있었는데 그 길을 무해한 사람들이랑 함께 걸었다. 무지무지 좋았다 시몬!

코스를 마구 제안해서 뭔가 계획있는 사람처럼 비춰졌지만, 사실 그냥 망상을 실현시키는 시간이었다. 돌탑까지 갔다가 '와 생각보다 짧네에-'를 한번 느끼고 다시 돌아와 연못 앞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사진찍기. 게다가 오늘은 지난번에 '나는 못 가봤는데 저 사람들은 지나가잖아!' 코스도 함께 지나쳤다. 너무나 사정없이 다정하고 귀여운 시간이었다. 목요일마다 만나서 에너지를 채운다면 밤 중 세차를 안하고도 살 수 있겠네.


그치만 사실은 사무실에서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들여다보면 별일이 아닌데도 오래 긴장하는 바람에 부담을 키우던 일. 음악도 없고 말도 없는 세계에서 투닥투닥 숫자들을 맞추고 점검해야하는 일. 그런 일은 무겁고 생각만으로 힘들어서 도리어 '디자인만 하고 살면 좋겠네에' 라는 생각을 해버리게 한다. 여튼 저녁 급식으로 시내가 피자를 사준 덕분에 숫자를 잘 맞춰냈다! 혼자 야근하지 않은 밤!


징규샘이랑 엄지도장의 연결 회의도 했다. 사실 나의 긴장은 징규샘을 어떤 코스로 뭬셔야하나... 였고 책은 알아서 해주시겠지 미안해서 어쩐담.. 이런 마음이었는데 오늘의 코스를 성공했으니 여한이 없었다. 책은 의식하지말고 하던대로 하기로. 다만 내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전했다. 조금 천천히 정성을 들여 써보고 싶고, 여러 sns에 썼던 이야기들을 모아보고 싶다고. 징규샘이 몇가지 가지들을 제안해주셨고 그게 너무 찰떡같아서 좋았다. 그동안 반복적으로 해왔던 이야기들이 꿰어지는 느낌이랄까.

집에 오는 길에 징규샘이 해준 말을 천천히 떠올리다 갑자기 메이가 생각이 났다. 성미산학교에 있을 때 나의 멘토였던 선생님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다. 해야하는 일은 하나도 안하고 하고싶은 일들만 했다. 아마도 파워J에 가까웠던 메이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가끔 일을 안(못)하는 사람을 만나 답답해질 때면 메이의 심정에서 그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메이는 다정함을 잃지 않고 연말에 편지를 써주셨다. 빨강머리앤이 여러 집을 떠돌다 마릴라에 집에 정착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맞는 드레스를 입을 때, 행복해했던 장면이 떠오른다고. 산소가 몸에 맞는 옷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대학에서 배운 특수교육이 안 맞아서 지지리도 오래 고생했던 시간을 지내고 말과 글과 공동체의 세계에 푹푹 빠졌던 시절이었다. 커다란 전환의 시기. 아무튼 지지리 일도 안하는데도 행복해보인다는 말을 저리 친절히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다정과 꼼꼼을 오래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 일의 기억 속에 가장 멋지고 먼 사람은 메이. 꼬박 10년 전 이야기다.

돌아오는 길에 징규샘이랑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흐트러진 말들을 꿰어내는 일이 옷을 맞추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 몸의 치수를 재어주고, 어울리는 소재들을 발견해주고 그 옷을 뒤에서 정성스럽게 재봉하는 기분. 나는 손발을 잘 찾아 꼭꼭 집어넣고 해지지 않게, 구멍을 기우면서 입어야지. 몸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게 지켜야지. 오래오래 입어야지.



나는 여전히 메이처럼 저렇게 다정하게 멋진 말을 소근하게 건낼 수 있지는 않지만. 이런 꼭꼭 숨은 기억들 덕분에 애쓰며 살게 되는 것 같다. 따뜻한 마찰. 꼼꼼한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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