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빛에 이름을 붙인다면_11.04

by 소산공원

제법 날씨가 쌀쌀해져서 아침부터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었다.

오전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일을 하나 해치우고 중앙시장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다.

중앙시장은 천안에서 두번째로 사랑하는 나의 구역.

허송세월 때 가게 안에 있는 게 너무 지겨워서 맨날 문도 안 잠그고 뽈뽈뽈 중앙시장을 싸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개나리 시장의 만두, 구석의 보리밥집, 지저분한 즉석떡볶이집, 여름엔 꽃을 팔고 겨울엔 홍합을 팔던 할아버지들의 노점상, 난로 위에 덥혀먹으면 정말 맛있는 우유파운드식빵, 시장초입의 치킨집, 동남아 식재료를 정말 싸게 팔던 노점, 부추가 잔뜩 들어있는 천원짜리 중국식 만두가게.. 친구들이 올 때마다 시장 한바퀴 돌고 거나한 상을 차려내던 기억.

그 중에 날이 추워지면 생각나는 것은 우연히 들어갔다가 잔치국수 맛에 반해버린 '자기야'란 포장마차다. 잔치국수야 거기서 거기지만, 엄마가 해준 맛과 가장 가깝달까. 그렇다고 자주 가는 것은 아니고 찬바람이 불면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드문드문 가다보니 매번 비슷한 레파토리가 이어진다. '우리 가게 알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네.' 오늘도 역시 그런 말로 시작. 국수 전문점이 아니기 때문에 꽤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낮이든 밤이든 취한 노인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주정을 하거나 타박하고, 누군가를 쫓아내기도 한다. 이런저런 시끄러운 풍경들에 마음이 웅성웅성 할 때 쯤에 국수가 나온다. 그럼 따뜻하고 진한 국물 맛에 한번 감탄을 하고(이쯤에서 막걸리를 시키게 된다), 김치를 당연히 많이 달라고 말한 다음 호로록 먹는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 육수를 얼마나 오래 끓여야하는지, 얼만큼의 정성이 들어갔는지, 내가 몇시부터 준비를 해왔고 여기서 장사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소연이 이어진다. 듣다보면 배가 잔뜩 불러있고, 찐한 국물에 입이 짭짤해진다. 돌아가는 길엔 귤이든 요구르트든 간식을 하나 손에 들고 마무리. 이 시간들은 귀엽지만 지겹고 아프다. 그래서 애정하는만큼 자주 오진 못한다. 찬바람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곳곳에 있어서, 당연하고 가까운 내 일상이 도리어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뭐든 이해하고 싶어진달까. 소란을 견디는 일, 지겨움을 사는 일에 대해.


아무튼 내 삶에도 내 나름의 지겨움이 있는거다. 지겨운 몇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도망가듯 공주 나들이를 갔다. 해가 지는 시간을 놓칠까봐 초조해하며 가는데 갈색 선글라스를 낀 덕에 가을 풍경이 2.8배 예뻐졌다. 낮달이 잘 보이는 때다. 공주에 도착해 빛이 좋은 시간에 황새바위 성지에 갔다. 사장님이 추천해준 쪽길로는 가지 못했지만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넉넉한 빛들을 볼 수 있었다. 살면서 최고로 성지에 많이 간 한 해다. 아니 한 해도 아니고 겨우 한두달 사이에. 마주하는 구멍난 동상들, 묵주기도의 길을 읽다 보면 막 눈물이 덥혀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울기 위해 혼자 오진 않을 것 같다. 그럼 남들 앞에서 혼자 울고 싶은건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는 일은 정말 어렵다. 호이호이 내려오는 것 같다가 손에 닿으려고 치면 내 움직임에 다른 바람이 만들어지는 것인지 갑자기 바람의 길이 바뀌어 재빠르게 손 사이를 빠져나간다. 바람의 길을 만들지 않으려면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여야하는데 그럼 다른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란거다. 커다란 십자가 조각 앞에서 하늘과 커다란 나무와 바람을 보면서 기도를 했다. 나뭇잎을 잡게 해주세요..


반죽동 247에서 커피를 사고(여기도 한달사이 네번째다) 공산성에 산책을 갔다. 입구에서 죠수바 색의 노을을 보았다가, 산성 뒤에 떠오른 달을 봤다가. 바쁘다 바빠! 사방을 둘러봐도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부지런히 산성 위로 올라가 노을을 보려고 했지만 중년여성클럽의 사진을 찍어주다가 뭔가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린 듯 했다. 그치만 깔깔 즐거웠으니 다행이야! 그 사이의 남의 핸드폰을 떨구다니 나도 참. 여튼 기둥 뒤에서 노르스름한 하늘을 더 구경하다가 연지까지 걸어갔는데 시내가 연지 뒤 영은사 불빛을 보고 저게 뭐야? 주막이네 했다. 그 때부터 약간 시내가 주막(절)을 찾아온 영혼처럼 굴었다. 센과 치히로에서 신들이 호텔에 찾아온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 생각나 조금 진심으로 무서웠다.

공산성에서 나와 민주샘이 추천해주신 전골집에 갔는데.... 갔는데..........울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전골이었다. 더 울고싶은 건 술을 함께 먹지 못했다는거다. 시내의 만류로 참기도 했고, 사실 내일 일정을 위해서 먹을 수 없었다..괜히 내일 일정이 미워졌달까.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그 맛있는 안주를 식사로 먹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맛집이 있는데 한가하다니. 공주사람들은 대체 뭘 먹고 사는걸까? 맛있게 먹는 먹깨비들 덕분에 볶음밥까지 먹고 그릇을 박박 긁어 먹었다. 일하는 선생님이 '아유 그릇에 구멍을 낼라했네' 하셨다. 이런 충청도 유우모 귀여워!

가게의 주요 인테리어 방향은 '손님들 사랑해요, 우리는 곱창의 신이에요'였는데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써져있어서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브랜드의 진정성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로군..... 정말 공주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꼭 안주로 먹고 싶어졌다. 공주에 와야하는 이유가 또 생겨버렸다.


집에 돌아와선 미룬 빨래를 개고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을 찬찬히 읽었다. 이것 역시도 공주의 서점인가 가게에서 무심코 보고 지나친 것이다. 마침 시내가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길래 읽어보았는데, 내용이 좋아서 엊그제 따라 산 책이다. 좋은 순간들. 아름답고 복잡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말들과 풍경을 담은 책이다. 그 순간을 누군가 먼저 이름을 붙여놨다니.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예를 들어 이런 것.



보르프럿.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쁜 일을 미리 짐작하고 즐거워하기.

-납치를 계획하기 하루 전, 혼자 상상하며 낄낄거렸던 순간.


메라키.

어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깊이 녹아 들어가 진심과 영혼을 쏟아붓는 상태. 무슨 일이든 메라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랑을 담아 누군가를 위해서 커피를 내리는 일. 우리는 이런 작은 일상에도 온 정성을 다하곤 한다.

-곱창의 신 선생님들의 태도. 당면을 착착 짤라 주실 때 반찬접시를 다소곳히 내려주길 때 알 수 있었어요.



헤젤리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감각. 자신보다 더 굉장한 것에 속해 있다는 기분. 공원에서 즐기는 피크닉, 보트 타기, 카페에서 즐기는 데이트... 그 어떤 일에도 헤젤리흐를 느낄 수 있다.

-요것은 몽골에 다녀온 이후로 가장 크게 느낀 감각.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떤 다른 우연한(우연함을 인지하는)즐거운 순간들이 생긴다. 그럼 뭔가 겸허하게 우주 안에 순응하면서 뜻대로 하소서... 저는 그냥 시키는대로 좋을게요... 하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굉장한 것에 속해있다는 기분.


으아 좋다. 선물하고 싶은 친구들이 마구마구 생각났다. 이 빛을 담을 말이 있다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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