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하러 가는 길 버스에서 쉐이프오브워터를 봤다. 분명 무지 재밌게 봤던 영화인데 또 새마음으로. 다른 매체에 비해 영상을 기억하는 일은 특별히 더 못한다. 적어도 3번이상은 봐야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좋은 영화를 보면 생각을 마구 키워나가게 되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걸 그때그때 기록할 수가 없으니(특히 영화관에서!) 금방 흩어지게 되는 것이 늘 아쉬워서, 영화의 속도와 내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 이후로 영화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영화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책이든 영화든 그 미디어의 좋음을 느끼고 내 감각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은 비슷한 것 같다. 정지한 책 안에서 나의 문장을 찾아내는 시간과, 흐르는 영화 안에서 멈추어서 순간들을 포착하는 시간. 뭐든 좋은 걸 만날수록 충분히 읽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아직 다 안봤으니 다 보고 일기써야지 히히 .
요지는 일요일에 회의를 하러 서울에 갔다는거다. (팀원들에게 미안하다 흑흑...ㅜㅜ) 원래 일복이 많은 팔자라고는 했는데 올해는 특별하게 그 말이 더 와닿는다. 전보단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되서 다행이다. 일에 대해 말하는 것, 더 잘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 좀 진심으로 진심을 다해야 후련하다. 후하. 올해 정말 후련했어! 나는 친절을 위해 과한 애를 쓰는 편인데, 올해는 다정하고 친절하게 일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것 같다. 일하는 사람, 일을 권해야하는 사람의 가장 큰 친절은 준비를 잘 하는 것이다. 제안하는 일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고 예상되는 질문들을 준비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의 카테고리를 준비하고 그걸 기록하고 선명하게 만드는 일.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들을 인정하고 빠른 피드백을 주는 일. 위기의 순간을 예측하는 일. 서로의 가능성을 열거나 닫아주는 일. 여하튼 일하는 사람으로 배워야하는 덕목들은 너무 많고 이 즐거움을 놓칠 수가 없다.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
어제는 이모데이. 몇달 만에 보았다고 10분정도 서먹해하더니만 하루종일 껌딱지처럼 고백하던 어린이들. 예산 간 김에 재식이커피에 갔는데 한사장이 막 공짜로 요거트주고 과자도 주고 오미자도 주고 아무튼 가게를 거덜 낼라고 그랬다. 일복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거덜 날 팔자인가봐. 막 퍼주고 나눠주면서 일도 조곰하고 돈은 많이 벌고 다정한 부자가 되고 싶다. 내가 아는 모든 사장님덜 힘내서 조금만 일했으면!
그치만 금요일날 공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와 불가능에 대해 얘기했다. 덜 일하고 부자되는 것? 세상에 그런 건 없어. 그런게 없다고 말하는 순간의 패배감. 그리고 이어지는 안도. 인정하는 순간 편해진다. 세상에 그런거 없으니까, 고만고만한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할 수 있는 것들을 연결하고, 마주하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그나마 가능한 일들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 불가능이 재밌어서 살 것 같다.
소중한 걸 잔뜩 껴안고 내 집 구석에서 잠들진 않겠다!
(요새 부쩍 생각나는 재환샘 노래. 가사쓰기 천재.)
<책과 사람 사이>
혹시 나와 같은 책을 손에 든 사람을 만나도
다가서서 말을 걸면 미친 놈 취급을 받겠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중한 친구가 늘어 갈 동안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점점 더 외롭게 만들어
저 사람들도 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더라도
함께 읽는 이 책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겁내지 말고 말하고
할 수 있는 걸 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야지
소중한 걸 잔뜩 껴안고 내 집 구석에서 잠들진 않겠다
무기력한 흥분을 딛고 얻어낸 책과 사람 사이에 있는 무언가
읽는 동안엔 세상이 온통 뒤집힐 것 같아도
읽고 나면 원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그대로
책 파는 장사꾼의 통장에 잔고가 늘어 갈 동안
그걸 만든 사람들은 시달리다 내팽개쳐져
어디서 주워들은 혁명의 기억이 늘어 갈 동안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
아는 것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함께 만든 이 책이 우리의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한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겁내지 말고 말하고
할 수 있는 걸 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야지
아름다운 꿈을 꾸고선 같은 삶으로 돌아가진 않겠다
다채로운 무감각을 뚫고 움켜쥔 책과 사람 사이에 있는 무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