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역사_11.21

by 소산공원

오늘도 맥주를 마신다.

요새는 밥을 하기 싫다기 보다는 퇴근하고 장을 보러 가기가 무지무지 싫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먹는다. 며칠 전 사놓은 만두랑 죽이 있어서, 죽을 덥히고 만두를 굽고 들기름에 김치를 볶았다. 아무래도 맥주없이 만두를 먹기 힘들 것 같아서 굳이 4층을 오르고 내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온다. (이 정성이면 장을 봐오지...)

집 앞 세븐일레븐에서 제주맥주에서 만드는 '와,캬'를 4캔 5000원에 팔고 있다. 라이트 에일 맥주를 좋아하지만 '와,캬'는 4캔 만원으로 사기엔 늘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정도의 싼 맛이라면 괜찮잖아! 맥주예산의 총액을 맞추어야 하기에 8캔을 사고, 만두랑 함께 먹을 칭따오랑 버드와이저까지 곁들여 사오곤(??애초에 만두랑 어울리는 맥주 사러 나간거잖아..) 편의점 아저씨랑 수다를 하다가 올라와 밥을 먹었다. 죽이랑 맥주랑 만두랑.


요샌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으니 맥주 얘기나 더 해봐야겠다.


내가 의식을 갖고(?)맥주를 마셨던 첫번째 기억은 중학교 2학년 친구네 아파트 옥상이다. 내 친구들은 어쩐지 다 조금씩 가난하거나, 집안에 사정이 있는, 아무튼 어두운 구석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나도 거기에 별로 뒤지진 않아서 그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튼 지금은 사라져버린 (구)롯데마트 건너편 먹자골목에(지금은 대구막창이 있는 자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조금한 구판장이 있었다. 어르신들의 눈과 귀가 어두우니, 이미 약삭빠른 청소년들이 술이며 담배를 살 수 있는 곳으로 소문이 난 공간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항상 무서운 언니 오빠들이 사복을 갈아입은 채로 어슬렁 거리고 있어 지나다니기 무서운 곳이었다. 아무튼 우리 친구들에게도 그 구판장에서 술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룹 중 꼭 있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친구가 피쳐 몇 병을 사는데 성공했고, 우리는 대낮에 청솔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마셨다. 대낮에, 미지근한 맥주에, 종이컵이 눅눅해지고.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이람..(지금도 피처 혐오함) 그치만 분위기는 참 좋다, 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몇몇 친구들이 흑흑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14살의 온갖 힘든 생과 가족사를 고백하기 시작. 나도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눅은 맥주를 마시면서 동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룹 중 가장 가까웠던 친구 한 명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집은 엄청 화목하고 행복한데. 나는 엄마랑 아빠랑 사이가 좋은데.' 다들 남의 얘기는 듣지 않고 본인의 슬픔 안에 빠져있었던터라 금방 지나가버린 순간이지만, 나는 그 때 '이 새끼랑 평생 친구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남의 슬픔을 공감지 못하는 사람하고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해준 예고편 같은 기억이랄까. 아무튼 아직도 걔가 잘되었다는 소식을 인스타를 통해 접할 때마다 종종 묘하게 배알이 뒤틀린다. 세상엔 별로 그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나보다.


두번째 기억은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기억.

여러번 말했지만 숱하게 했던 알바 중에 가장 많이, 오래 했던 알바는 세계맥주바, 술집서빙 등등의 일이다. 내 20대 초반의 많은 지분을 차지한 세계맥주집에서 매일 맥주를 마셨다. 그 때는 손님들과 노닥거리며 술을 얻어먹고 매상을 올리는 것도 일이었다. 단골 손님이 오면 종종 코로나나 호가든 병 맥주를 얻어먹었고, 다트게임을 제안해서 그 때 당시 비싸고 유행이었던 머드쉐이커나, 둔켈 같은 병맥주를 따먹기도 했다. 그치만 흔히 먹는 술은 생맥주였다. 10시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손님이 많아 시끄러운 노래를 틀어둔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퇴근하는 시간이어서 그때부터 알바생들과 같이 즐겁게 홀짝 홀짝 생맥주를 따라마셨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거품 많은 맥주를 좋아하고, 많이 따라두면 식으니까 항상 225 글라스로 반정도만 따라 단 숨에 마셨다. 쟤는 참 맥주를 맛있게 먹어.. 손님들에게 자주 듣던 얘기. 칵테일을 얼마든지 만들어 마실 수 있었지만 한 겨울에도 찬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생맥주 기계의 신선함을 관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일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경험 덕분인지, 불특정다수의 손님들이 찾아오는 곳에 가면 약간 서비스맨의 활발한 자아를 갖게 된다.


세번째는 편의점 4캔 만원 맥주가 본격 부흥했을 무렵의 기억. 2016년 말에서 2017년? (그 시기의 기억은 정말 흐릿하다!) 한 일년정도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 들어가 산 적이 있다. 마구 함부로 먹고 함부로 지내던 시절.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두 캔정도는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마시고, 나머지는 공원을 어슬렁거리거나 집에 들어가서 해치우는 일상. 그 때의 애인은 매일 콜라 1.5ml를 마셨는데 우리는 서로의 살이 쪄가는 눈금들을 눈에 띄게 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 때 열어 제껴버린 혼술맥주의 세계를 지금도 닫지 못하고 있고.... 시골로 이사간 이후엔 편의점 맥주는 너무도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도시의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기회는 드물어서 늘 생맥주를 그리워하며 지낸다. 생맥주에 시샤모 먹고 싶다........


여튼 지금은 중독과 습관, 목마름과 허함으로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꼭 맥주를 마시고 잔다. 고 말하지만 여전히 맥주는 맛있어서 먹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와'를 한 캔 비웠으니 이제는 '캬'를 먹어야지... 하는 기대되는 마음. 나같이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금방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이렇게 오랜 기억을 가지고 꾸준히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을, 맥주가 아니면 발견할 수나 있었을까. 무언가를 열심히, 꾸준히 해도 '좋아한다'는 그 자체. 그 외에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맥주가 아니면 이렇게 무용한 사랑을 해볼 수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고 상쾌하고 낯선 첫 모금. 용주샘의 말처럼. 맥주는 인간이 목 마른 존재라는걸 깨닫게 해주는 유일한 것!




덧.

1. 갑자기 맥주 얘기하니까 신나서 잠을 잊어버림... 맥주야 존경해.


2. 냉장고에 공허하게 붙어있는 바이바이비어맨포스터....

맥주를 그만 먹게 되는 날도 오긴하겠지. 사는건 그런거니까.......갑자기 인생 고독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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