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삶_11.29

by 소산공원

1.

오늘은 간만에 야근을 해서 일기를 넘기려고 했으나 퇴근길에 허회경 노래에 뚫려버렸다.

한구절에 기어코 기어코. 좋은 문학가다.


애정 어린 품을 원했었으니

아무개 품속에 들어가 앉았지요

이런 나를 당신은 꼭 기어코

기어코 뚫고 지나가나요.

허회경-기어코 기어코



슬슬 연말정산을 말하는 시기. 올해는 기록을 충분히 했는데도 정리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많아서 말하고나면 시시해져버릴까봐. 이럴 땐 정말 예술가. 이런 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문장 안에 나만 알 수 있는 기호같은 것들로 숨겨버리는 일.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들을 감추어 놓고 영원히 들키지 않으며 더듬는 일. 아름답게 보이는 일. 비밀스러운 서로를 관통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일기쓰기였다. 보이기 위해 열심히 솔직하게 나열했지만, 사실은 안전하게 감추하기 위한 날들이 많았다. 좋은 일들도, 슬픈 일들도 드러내고 나면 뒤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생겼다. 그림자에 숨어 있기 위해서 더 더 많이 썼다. 나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그늘을 지어낸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들도 그대로 두었다.


그렇지만 기어코 기어코. 그림자로 남길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날엔 비밀 일기를 썼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혼자 마구 그냥.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냥 마구 펼쳐놓았다. 그건 문장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다. 함부로 난 길의 지도를 찍은 사진 같았다.



2.

이런 일기를 쓰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 시내랑 나눈 대화도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람이 어려워질 때 그들이 까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패들을 상상한다. 그럼 좀 시시해지고 편안해진다. 어렵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투명한데, 시내는 처음 봤을 때부터 투명했다. 그걸 기어코 모르고 시내는 자기가 되게 어려운 사람인줄 안다.



3.

권나무의 노래 중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닌 비밀스러운 삶.' 이 가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어둔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내 페북 피드에서 '권나무'를 검색했는데 이상한 글을 발견했다.

2014년에 이맘 때의 글인데 권나무에 빠져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영상에서 마주친 이후에 적은 일기. 그러다 뜬금없이 '언젠간 만나고야말것같다'고 적었다. 신기한 것은 이 글을 쓴 기억조차 없는데 5년 후에 정말 동네에서 권나무를 만나게 되고.... 오늘 낮에도 시내랑 권나무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아무튼 비밀스러운 삶이 연결한 신기한 발견이다.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4.

그나저나 저 일기에도 뭔가 숨어있다. 그치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가 불쑥 들어와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던거지....? 이리도 기억을 못하는걸 보면 나는 역시 예술가보다는 함부로 찍은 지도같은 글을 쓰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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